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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1-5)


1절을 보십시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첫째로 여기서 일군이란, 고대 전함에서 노를 젖는 가장 하급 노예를 말합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배 밑창에 앉아서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노를 젖는 노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자를 이런 일군으로 비유한 것은 사역자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복음의 총 사령관인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라시면 가고, 오라시면 오는 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이 놀라운 진리는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중의 1급비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놀라운 마스터 플랜의 비밀도 사역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세상의 아무리 똑똑한 미래학자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사역자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이 구속의 계획과 인류역사의 흐름등 모든 하나님의 1급비밀들을 사역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바울은 사역자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함으로서 사역자의 직무의 신성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역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일군에 자질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학벌이나 뛰어난 언변이나, 수려한 외모나 대인관계, 경영과 행정지식등 여러가지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토록 중요한 덕목인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충성을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충성은 한자로 忠誠입니다. 충(忠)은 마음 중심을 말합니다. 이는 마음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흐트러짐이 없이 한결같은 것을 말합니다.

성(誠)은 말한 것을 이룬다는 뜻으로서 신실함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trustworthy, faithful입니다. 충성은 믿을만한, 신뢰할 만한, 변함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또 상황이 좋던 나쁘던 자기가 충성해야 할 분 앞에서 책임성 있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고려의 정몽주를 충신 중의 충신으로 봅니다. 그를 변하는 세태를 따라가지 못한 정치인으로 볼지 모르지만, 그의 시 ‘단심가(丹心歌)’는 시대가 변해도 우리들에게 진정한 충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변할줄이 있으랴” 정몽주에게 있어서 충성의 대상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었습니다. 우리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충성의 대상은 우리 주 예수님입니다. 우리 복음의 사역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주님께 한결같이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왜 복음을 맡은 자에게 충성이 가장 요구됩니까?

이는 사역자는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역을 맡긴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부탁한 것을 부탁한 그대로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하고 못하고 보다도, 주인이 처음에 맡겼을 때의 방향대로 한결 같은 자세로 감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맡은 자가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한다든지, 기분 좋을 때는 열심히 하다가, 마음이 좀 우울하다고 손을 놓아버린다든지 하면,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우리도 복음을 맡은 종들로서 충성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역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자세로 감당하는 마음 곧 충성심입니다. 예수님은 마24:45,46절에서 충성된 자의 귀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충성된 사람은 아브라함의 종입니다(창24장). 그는 주인 아브라함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서 주인의 마음을 120% 기쁘게 하고자 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들은 많지만, 충성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시대 우리 복음의 사역자들은 충성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다른 자질은 좀 부족하더라고, 그리스도에게 충성됨에 있어서는 주님의 인정을 받는 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요.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여기서 판단은 일반적인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의 충성됨에 대한 판단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역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을 충성이라고 말한 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충성되게 일해 온 사역자라고 판단되십니까? 아니면 충성스럽지 못한 사역자라로 판단하십니까?”(현대어 번역)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충성스러웠는가? 충성스럽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사람들 곧 고린도 성도들의 판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럼 바울이 사람들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판단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의 판단을 작은 일로 여긴 이유는 자신에게 복음의 비밀을 맡긴 분이 고린도 성도들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을 맡긴 분이 주님이시므로, 판단도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판단이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하여 사도바울은 함부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도, 조금도 불충됨이 없을 정도로 살았습니다. 와 대단합니다. 우리 중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신앙양심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사도 바울처럼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을까요. 저는 자책할 것이 너무나 많이 생각납니다. 바울이 자신을 돌아볼 때 “충성된 사역자”로서 자책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복음역사를 감당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이 완벽하다, 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의 직무를 아무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충실하게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주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직 판단을 주님께 맡기는 바울은 참으로 겸손한 사역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때가 이르기 전 곧 주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주님이 오시기까지는 성도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잣대로 사역자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사역자들도 자신에 대한 판단이 마지막 심판대의 그리스도 앞에서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칭찬의 위력

저자 소개 제리 D. 트웬티어 - 저자는 사립, 공립하교 일반 직장 등에서 환경 훈련 경험을 20년이나 하였다. 또한 작가, 상담원,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텍사스 공과대학에서 교육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40권 이상의 저 있으며 현재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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