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는 Nyskcism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교회을 비판적으로 보는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교회를 반대하는가의 정도의 상관을 살펴보고자 한 인터넷 신문에 발취기사가 올라간 글을 그대로 퍼온 것입니다 )
애착장애 교회 처방전은‘사랑’과‘치유목회’
철의 장막 붕괴 이래로 동유럽으로부터 자녀 입양을 한 여러 가정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입양자녀들이 자라면서 극단적인 문제증상을 나타냈다. 적대감, 친분관계 개발이 불가한 무능력, 사람들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 등이었다. 이들은 자기파괴적일 수 있고 거부감과 분노에 매우 민감하고 그들의 삶속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점들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온갖 관계는 이상화하면서 선입견이나 편견에 빠져서 접촉과 애정을 더 많이 갈구할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깨어짐과 단절은 더 급속해지고 더 분위기를 타게 되고 더 파괴적이 되면서, 마침내는 관계가 끝나 공허감 메우기에 급급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그런 신드롬을‘애착장애’(attachment disorder, AD)라고 부른 다.
필자는 컨설팅을 하면서 사랑과 권위이슈에 관해 일부 입양자녀들과 똑같은 애착장애 증세를 보이는 교회들의 경우를 본다. 그런 교회들을 필자는‘애착장애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또는 양쪽 모두로 버림받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고립
최근 필자가 다룬 한 애착장애 교회는 굉장한 역사를 가진 교회였다. 해외에 70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내보냈고, 소속교단에도 그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이 배치돼 있곤 했다. 수십년동안 영적인 건강과 복을 경험해 왔다. 그러던 25년 전, 그들이 한 목회자를 청빙했는데 그의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 절제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암이 감퇴되어 이 목회자는 3년간 성실히 양떼를 섬겼다. 그런데 암이 재발됐다. 이 목사는 하나님이 아내의 병을 완전히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의 ‘믿음의 입장’이 너무나 확고했기에 온 교우들은 계속 그들을 돌보고 모든 종류의 지원을 다했지만 환자는 점점 쇠약해져가더니 어느날 갑자기 숨졌다.
이 목회자와 교회는 금세 깊은 낙심과 절망에 빠져 들어갔다. 장례식을 치른 뒤 그 목사는 주일설교를 할 힘이 없었고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바로 그 주일날 오후 즉시 당회에다 사임서를 제출했다. “저는 이젠 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그의 사임서는 철회시킬 수도 없었고 본인이 설득 당하지도 않았다. 깊이 상처 입은 심령으로 괴롭던 이 목회자는 결국 그 교회와 사역처를 떠났고 하나님께 깊이 실망하여 그 후로는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조차 없었다.
이 교회는 목회자 부부에게 헌신적인 지원을 다해왔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에 그를 돌보려는 시도는 아랑곳없이 목자가 양떼를 버려두고 떠났고 서로가 가장 필요한 시각에 헤어지게 됐다. 그 교회는 그후로도 여러 해 동안 상흔을 안고 지내야 했다.
이 교회와 마찬가지로 애착장애를 지닌 자녀들의 양부모도 흔히 이런 깊은 정서적 고통을 겪다보니 아이들에게 물려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바꿔 말하면 포인트는 그 목회자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런 난국에서 목회자가 양떼를 버릴 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한복음 10:11-13)고 하셨다.
이 목회자의 상황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는 절망감 속에서 자기 양떼를 흐트러 놓은 채 떠났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목회자에 대한 추억과 상처가 잦아지고 정상을 되찾았다고 느낄 즈음 뭔가 심상치 않은 비건강 현상이 발발하기 시작했다.
이 교회는 그 목회자 부부를 아낌없이 지원했다가 크게 낙망한 때문인지 후임자 목회자에게 신경을 돋우었는데 비슷한 패턴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새 목회자는 건물 프로그램을 실천하여 새 지역으로 이사를 가더니 옮겨간지 불과 한달만에 보따리를 싸서 떠나 버렸다. 양떼들은 다시 한번 버려짐을 당했다. 쓰라린 좌절감을 맡보아야 했다.
한때 훌륭한 역사를 자랑하던 이 교회는 극히 중대한 시기에 이런 버림을 두번씩이나 당하자 목회자들을 문자 그대로‘고용인’들로 보기 시작했고 어떤 목회자나 사역자들도 사랑으로 지원하기를 거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급기야 교단에서는 이 교회에다‘목회자 킬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교회는 지도자를 이제 더는 신뢰하지 않게 됐고 그 결과 지도자들이 양떼를 이끌려는 시도까지도 저항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떠나는 모든 목회자를 통해 이 신드롬은 악화돼 가기만 했다. “봐요! 우리가 옳았어. 이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장애 진단
과거에 교회들은 목회자가 도덕적인 실패 또는 영적인 학대로 인해 신뢰감이 왕창 깨어지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믿어주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일부 교회들의 목회자 사역기간이 평균 3년을 넘지 못한다. 교회들을‘이끌기 힘들게’또는 심지어‘불가능하게’만드는 요인은 절박한 고비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절박한 고비’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평선에 나타난 늑대-즉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종의 중대 국면-은 뺑소니 목회자를 내기가 쉽다. 그것은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충돌 또는 도전이다. 또한 헌금 금액 감소, 출석 감소현상, 교회당 이전, 건물 프로그램에 대한 집합적인 불안일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리드 당하기 어려운 교회에 있다면, 그리고 과거 목회사역진의 도덕적 실패나 영적인 학대 행위 따위가 없었다면, 필시 애착장애 신드롬 교회이기가 쉽다. 애착장애 교회는 몇가지 공통된 증상이 발견된다.
1. 분파 또는 분열의 경험
필자가 상담한 한 교회의 설립자는 목회리더십에 있어 이른 바‘교황 모델’을 따랐다. 그 교회는 그의 자애로운 독재에 의해 오랫동안 성장하고 번창했지만 평신도들은 훈련과 검증을 거치지 못해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위기 순간이 다가와 그 목회자는 부교역자들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자 그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열망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지금까지 모습 그대로 소극적/피동적으로 그를 대했고 마침내는 전혀 지원받지 못해 목회자 자신이 낙담해 버렸다.
결국 상심한 그 목회자는 교회를 떠났고 교회는 휘청거렸다. 또다른 부교역자는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 묘사했다. “그 목회자가 떠나자 회중의 분파와 분열이 일어났다. 끔찍했다.”
2. 목회자의 음성에 대한 거부
예수님은 건강한 목양관계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신다. “내 양떼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또한 양떼는 음성을 들을 뿐더러 거기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애착장애의 주된 표지는 인도자의 음성에 대한 반응결핍증이다.
한 목회자는 애착장애교회에 대한 악몽 같은 자신의 경험을“벽에다 대고 말한 느낌”이라고 회고한다. 거부감은 적극적/소극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목회자의 설교에 매우 비판적이 될 수 있다. 목사를 하나의 고용인으로 생각하기에 목회자에게 설교할 것과 설교방법까지 일러주는 권한을 가졌다고들 자임한다.
소극적으로는, 교인들이 단순히 회중석에 앉아 팔장을 끼고 어떤 말씀에도 요지부동 일 수 있다. 설교자가 아무리 열정적이라도 그들의 행동을 역동화시킬 수가 없다는 뜻이다.
3. 목회자와의 친밀, 관심의 결여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양떼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단순히“나는 그들을 알고”라고 하신다. 이 앎은 양떼가 목자의 말을 듣고 반응함으로써 상호적이 된다. 대다수 교회에는 소그룹이 있고 짧고 간단하게라도 목회자와의 커넥션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착장애 교회는 목회자를 알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동기와 행동, 말이 이상하게 오해/오인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다보면 깊은 외로움을 자주 느끼게 된다. 한 애착장애교회의 목회자는 월요일을 싫어한다고 했다. 까닭은 자신의 문앞에 쌓이는 편지와 이메일 등이 모두 그의 메시지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
“놀라운 것은 그들이 얼마나 자주 저의 주안점을 놓치냐는 겁니다!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듣습니다. 그들이 나를 약간이라도 안다면 나의 말 내용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일 수 없다는 걸 알 겁니다.”
4. 목회 리더십에 대한 저항
예수님은“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그들을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다. 교회들은 그들의 목회자들을 신뢰할 때 따르는 경향이 있지만 그 반대도 사실이다. 목회자를 신뢰하지 못할 때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목회자는 예배의 스타일이나 새 지역으로의 이전 등 회중의 신뢰를 요구하는 리더십 이니셔티브를 시도하기까지 그 사실을 모를 수 있다.
5. 혼동과 무력, 부정성의 영
예수님은 목자 잃은 양떼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풀이 죽은 양떼에게 깊은 온정을 나타내셨다(마태 9:36). 이것은 애착장애 교회의 역설적인 본성을 설명해준다. 목자의 존재와 출현에 흥분까지 하는 교회인데 그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고, 목자가 있다고 느끼질 못한다
. 애착장애 교회를 위한 희망
입양자녀들은 훌륭한 부모를 모시고서도 애착장애를 겪는다. 한 루마니아 소녀를 입양한 부모가 말한다. “우리는 순진하게도 사랑을 가득 담고 생각했죠. ‘이 아이가 학대를 당하고 상처를 입고 버림받았어도 결국 우리의 사랑으로 치유될 것이다’라고요. 그런데 판단 착오였습니다. 사랑과 돌봄에 대한 아이들의 저항감에 대해 우리는 황당하고 무력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애착장애 교회들은 목양을 간절히 열망하면서도 완전히 저항적일 수 있다. 그런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심호흡을 하고 속깊이 하나님의 선한 목자장의 임재를 확인하라. 그분은 당신의 목양에 필요한 온갖 자원과 사랑을 부어주시지 떠나시지 않는다.
사랑과 치유의 목양을 위한 몇 단계를 살펴보자.
1. 문제의 분수령을 찾아라.
그 교회의 역사를 배울 필요가 있다. 현재는 과거의 문제의 재발일 수 있다. 터닝포인트로 되돌아가 당시 상황과 컨텍스트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라. 당시의 핵심인사들과 만나 문제발생의 원인, 경과, 결과 등을 물어라. 치유에 필요한 둘째 단계를 밟을 수 있게 된다.
2. 정체성 회복을 위한 회개를 하라
이 개념은 존 도우슨의 책 <미국의 상처 치유>에 설명돼 있다. 도우슨은 현 상황을 도출한 상처를 찾아내어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과거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고백’형태로 목회자가 스스로 고백자가 되어 자임할 수 있다.
즉 현 목회자가 과거 이 교회를 버린 문제 목회자로‘출연’, 비슷한 죄인으로서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 한 명이 과거 문제인사들 전부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슈를 짊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상처와 고통을 날려보내고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이 정체성 회개의 힘은 강력하다.
3. 머물어라!
말뚝박기식 장기목회를 다짐하라. 물론 상처받은 목회자로선 쉽지 않겠지만 완전한 센스를 지탱할 수 있다. 버려짐에 대한 반응으로 대두된 문제라면 치유도 장기화하라. 위와 같은 치유과정이 나타나기까지 끈질기게 버텨라. 끝내는 더 머물고 견디기 쉬운 분위기가 될 것이다. 만약 아무 일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떠날 결심을 재고하기 전, 정직한 화해의 노력을 하라.
교회들은 장기헌신의 조짐에 민감할 수 있다. 필자가 목회를 한 어느 교회는 설립자가 17년간 목회한 뒤 2년 미만씩의단기 후임자를 둔 적이 있다. 내가 교회 뜰에 아스파라거스를 심자, 그 식물이 3년생임을 아는 교우들은 적어도 2년안에 내가 떠나지 않을 것을 알고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애착장애 교회들은 큰 도전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심정을 돌이킬 수 있는 사역자들을 기르시고 보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