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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나이스크운동의 새로운 과제-허호익

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예배회복 운동의 새로운 과제


허호익(대전신대 교수 www.theologia.pe.kr)


1. 교회의 본질 : 건물이냐, 회중이냐, 사건이냐


교회론의 첫 번째 근거는 교회(ecclesia)라는 특수한 용어에 기초한다.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무리'를 뜻한다. 따라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인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 구성원인 공동체와 회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인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 구성원인 공동체와 회중을 의미한다. 에밀 부룬너가 일찍이 잘 지적한 것처럼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 이해되면서 건물로서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부터 주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는 장엄하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경쟁적으로 건축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강매한 것은 교회를 단지 건물로 오해한 것의 역사적 극치라 할 수 있다.

건물 다음으로 교회를 연상케 하는 것은 대개 "성도들의 교제"이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 외적인 건물보다 부름받은 무리인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회중이 곧 교회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예수원의 토레이(Torey, 대천덕) 신부는 교회(敎會)라는 용어를 교회(交會)로 고쳐 부를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카톨릭 교회가 제도로서의 교회와 함께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 건물을 강조해 왔다면, 개신교회는 제도나 건물보다는 신앙하는 자들의 모임을 강조해 왔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에 의하면, 교회는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근래에 와서 교회성장론자들은 교회의 회중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회의 중요한 목표로 여기고 도시에서 회중의 증가를 위해서는 건물의 접근용이성과 시설의 안락성과 편이성을 강조하였다. 다시금 건물의 중요성이 교회성장의 척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어떤 목회자 그룹에게 설문조사를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했더니 교회의 외적성장에 치중하여 교회건축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회에서 가장 큰 애로 사항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예배와 교육 시설의 부족이라고 하였다. 많은 목회자들이 다른교회의 교회건축은 비판하면서도 자기교회의 시설협소는 목회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보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도 회중이 아니다. 최초의 마가 다락방 교회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중요한 것 장소나 회중이 아니라 그곳 그 무리들에게 일어나 놀라운 사건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는 건물이나 회중이 아니라 ‘화해의 사건’이라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거대한 교회에 거대한 무리가 모였다 하드라고 거기에 신앙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다면, 불신앙적인 관행이 횡행한다면 그 곳과 그 곳에 모인 무리를 참다운 교회라 지칭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성문제로 비난받고 공금횡령으로 사법처리 되고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하여 사회적으로 비난 받으면서도 교회 건물과 회중의 수만으로 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교회론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에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참다운 교회라면 잘잘못에 대한 시시시비와 회개의 사건이 일어나고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추어 신앙의 상식이 통하여야 할 것이다. 신앙의 상식은 안 통하더라도 최소한 일반적인 상식과 통념이라도 통하여야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항목이 있다.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한 대상으로 고백 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I believe in God),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I believe in Jesus Christ), 그리고 성령을 믿지만(I believe in Holy Spirit), 교회는 의지한다(I believe Church : Credo ecclesiam)라고 표현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거룩하고 초월적이며 신적인 존재이므로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다. 그러나 교회는 죄와 오류가 있으며 종말이 임하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도상(Pilgrim)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우리 자신이 바로 교회이므로 교회가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K. Barth, H. Küng). 더군다나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죄인의 공동체이며 동시에 의인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늘 교회 자체를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보려는 유혹을 받아 왔다. 가시적인 교회를 절대 거룩한 공동체로 여겨 모든 비거룩한 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의 거룩한 교회를 따로 세우려는 시한부 종말론자나, 가시적인 교회의 비거록성을 이유로 교회를 부정하는 무교회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는 온갖 짐승의 더러운 분뇨와 그 냄새가 진동한 곳이었지만 그곳이 또한 구원의 방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교회는 칼빈이 주장한 것처럼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통해 흠 없고 순결하고 거룩한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이어야 하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서 신앙의 사건과 화해의 사건이 항상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교회의 성서적 표상


성서에는 교회에 대한 여러 표상이 존재한다. 신약성서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교회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다. 에클레시아가 ‘불러내다’라는 뜻이라면 누가, 누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불렀느냐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누가 불렀느냐?'는 질문은 존재론적 본질에 상응하고 '왜 불렀느냐?'는 질문은 목적론적 본질로서 교회의 구조와 기능에 상응한다.

부르심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성령의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의 성서적 표상에 따르면 교회는 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벧전 2:9-10), ②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고전 12:27, 엡 2:22, 골 2:19) ③ 성령의 능력과 성령 안에서의 성화와 성도의 교제가 현존하는 곳이다(고전 3:16, 고후 13:13).

부르심의 목적도 삼위일체론적 존재 구조와 상응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사 하나님의 백성(laos)으로 남으라고 불렀으며(롬 11:5),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anum)을 세우도록 그의 지체로 불렀으며(골 2:19), 성령의 현존과 능력에 힘입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신 것이다(행 1:8).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길을 예비하고 그 첩경을 평탄하게 하는 전위대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앞당겨 맛보고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anticipation)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고(마 6:9) 하나님의 의가 이루워 지는 것이며(마 6:33), 하나님의 권능(dunamis)과 하님의 권위(exousia)를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preaching), 가르치고(teaching) 병자와 약자를 치유하는(healing) 것이다.


3. 교회의 3중 구조 : 이중구조에서 삼중구조로


교회론의 두번 째 근거는 '왜 불렀느냐?'는 질문에서 유추되며 목적론적 본질로서 교회의 구조와 기능에 상응한다. 호켄다익을 교회의 구조를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하여 이중적으로 보았다.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누구보다도 사건으로서의 교회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에클레시아를 삼중적인 화해의 역사요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교회의 어원 에클레시아는 불러 모음(calling out, gathering: 회집)과 불러 세움(calling up, upbuilding: 양육)과 불러 보냄(calling into, sending: 파송)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화해의 삼중적 사건 즉 소명과 양육과 파송의 사건 자체이다. 교회는 단지 모여서 흩어지는 2중적 구조가 아니라 ① 모이는 교회(불러모음) ② 양육하는 교회(불러 세움) ③ 흩어지는 교회(불러 보냄)라는 3중적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신학적 양극화이다. 복음주의자들의 교회의 모이는 구조를 강조하여 개인구원과 기복신앙의 성장제일주의로 기울어 졌고, 반면에 에큐메니칼 노선을 따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하기 사회구원과 인간화의 사회변혁에 기울어 지게 되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교회론적 대안은 양육하는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찌기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칼빈은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셔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는 신자들을 잉태하고 양육하고 성장케하며 보호하고 인도한다고 하였다. 훈련받은 병사가 전투를 잘하듯, 양육받은 성도만이 진실된 봉사와 힘찬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모이는 구조로 편향된 교회가 흩어져 선교와 구제의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를 통한 신앙의 양육의 기능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모여든 신자들을 바르게 양육하여 그들이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면 교회 안에게 겸손하고 진실되게 봉사하게 되면, 그리고 흩어져 나아가 선교와 구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을 직분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흩어지는 교회들이 사회개혁의 세력으로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것은 그들이 제대로 복음으로 양육받아 장성하기도 전에 성급히 흩어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모이는 구조와 양육받는 구조와 흩어지는 구조의 삼중적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3. 교회의 기능 : 3중 기능에서 6중 기능으로


원형적 이상적 모델 교회로 등장하는 오순절 교회의 역사적 사건이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교회의 구조와 기능을 유추할 수 있다. 교회의 구조는 그대로 교회의 구체적 기능과 밀접한 구조를 뛰게 된다. 전통적으로 사도행전 2:42-47에 기초하여 교회의 기능을 삼중적으로 해석하여 왔다. 즉 선포적 기능(kerygma), 봉사적 기능(diakonia), 친교적 기능(koinonia)이다.

그러나 오순절 교회의 사건을 구조적으로 정리하면 몇 가지 기능이 더 세분화되고 추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 부활을 체험한 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약속과 명령에 따라 한 곳에 모였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회개와 죄사함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 무리들 가운데서 사도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복음을 선포하였으며(kerygma), 그 무리들은 또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didache),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고 떡을 떼었으며(liturgia), 서로 교제하였고(koinonia), 그리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diakonia). 그 결과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으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따라서 교회는 ① 예배 또는 예전의 기능(liturgia), ② 선포의 기능(kerygma), ③ 교육의 기능(didache), ④ 교제의 기능(koinonia), ⑤ 나눔과 섬김의 기능(diakonia) ⑥ 전도 및 선교(missio)의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 6가지 기능은 나이스크 운동의 구체적인 5가지 지침과 상응한다. 예배와 예전은 주일성수(Keeping for Lord's Day)와 새벽기도를 통한 새로운 생활(New Life)에 해당하고, 말씀의 선포와 교육의 기능은 하늘의 만나(Yielding for Manna)이며 영혼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애독하는 것이다. 나눔과 섬김의 기능은 온전한 십일조 드리며,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생활화 하는 온전한 헌금생활(Complete Offering)을 통해 이루어지며, 전도와 선교는 성도의 열매인 개인전도의 구령생활(Salvation for one by one)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바른 예배를 회복하자는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하며 말씀의 회복, 기도의 회복, 찬양의 회복, 전도의 회복, 그리고 경건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전위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예배회복의 운동의 새로운 과제


나이스크 원리와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토착화되어 과정에서 세계 교회에서 유례 없이 강조되고 있는 신앙덕목 즉, 주일성수, 새벽기도, 성경애독, 십일조, 개인전도의 특징과 새로운 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일성수((Keeping for Lord's Day): 예배와 생활의 일치

한국교회는 주일성수와 각종 예배 참석을 신앙의 기본덕목으로 아주 강조 한다. 한국교회만큼 예배의 횟수가 많은 교회도 없을 것이다. 주일예배,저녁예배,수요예배,구역예배,철야예배 그리고 매일 새벽예배 등 예배를 강조하여 왔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교회는 모이기 힘쓰는 교회가 되었다. 많이 모이기를 경쟁하다 보니,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와 교파별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모두 한국에 있게 된 것이다. 세계의 50대 교회 중 과반수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열심히 모이는 것은 중요하고 귀하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자랑이기도 하다.

천 이백만 성도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한국사회에 곳곳에 흩어져서 일상생활을 통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일에는 등한히 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과 공신력이 땅에 떨어졌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의 내적 외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등불이 아무리 많아도 어둔 세상을 비추지 않고, 교회 안에만 모아 둔다면 그 등불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한국교회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고 만 것이다. 그 빛을 세상에 두루 비추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주일성수의 신앙생활에는 열심이지만, 신앙의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바울은 진정한 예배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로마 12:1)이라고 하였다. 예배와 일상적인 일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정생활, 학교생활, 사회생활 등의 일상생활과 분리된 신앙생활은 신앙의 생명력을 지닐 수가 없다. 일상 생활과 분리된 ‘신앙생활’을 잘하는 교인보다, 생활 속에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생활신앙’을 잘하는 교인이 많아야 한국교회는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참다운 영성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사귐 뿐만 아니라, 이웃과 수평적 사귐 세계와의 순환적 사귐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를 돌보는 삼중적인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2) 새벽기도: 듣는 기도와 일치의 기도

새벽기도 뿐 아니라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에서만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는 새벽기도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어느 종교든 사제의 새벽 기도나 예불은 있지만 일반 신도의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유일한 신앙형태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유독 이런 특별한 기도를 강조하여 왔는 데, 그 전통은 영계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상기도, 금식기도 등 여러 성격의 기도를 강조하는데 기도의 내용과 형식은 대동소이하다. 통성으로 드리는 간청기도가 주종을 이룬다. 기도는 신의 뜻을 간구하는 신탁이다. 나의 뜻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독백적인 측면이 강하다. 나의 소원을 간청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영적 감수성과 영적 능력을 강화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가 더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성숙한 기도의 자세인 것이다. 예수께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길(마 26:39) 기도하신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듣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의 간청이 이루어지는 것을 응답받는 기도로 역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내 뜻대로 살기를 간청하고 고집하면서 그것을 대단한 신앙인 것처럼 칭송한다.

수도원에서는 묵상기도와 함께 관상 또는 정관기도(contemplation)도 중요시하였다. 관상기도하나님과의 일치의 기도로서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지성과 의지와 감정과 의식을 소멸시키고 자아마저 온전히 비워 무상 무념상태에서 온전히 하나님만이 나의 존재와 의식 속에 가득 차도록 나를 비우는 기도이다. 간청 기도가 나를 채우는 기도라면, 관상기도는 나를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기도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또한 기도와 삶의 일치를 지향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기도와 삶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금식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금식기도는 간청기도의 방편으로 소원성취를 위한 지극정성으로 드려지고 있다. 그러나 금식기도의 영성적인 의미는 육체와 물질의 소욕을 이기는 훈련이다. 자기가 먹을 음식을 남에게 주는 것이 참된 금식의 의미이다. 수도사들은 주린 자에게 구제할 것이 없을 영우 자신이 먹어야 할 음식을 나눠주고 금식을 하였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기 때문이다(이사 58:7).


3) 성경 애독(Yielding for Manna): 말씀을 알아 듣고 행하기

한국교회는 성경을 상고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경전을 중시하는 유교적인 전통을 이어 받아서 인지는 모르나, 성경을 중히 여기고 성경을 신성시하는 전통이 아주 강하다고 여겨진다. 성경의 내용을 자세히 모르더라도 성경을 읽는 것 자체를 신앙의 덕목으로 여기는 전통이 없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을 1년에 일독하도록 계획서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배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성경통독을 위한 집회가 성행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성경을 필사하는 교인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비판적으로 따지는 일을 꺼린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고 한다. 바울은 믿음을 들음에서 난다(롬 10:7)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정이 아주 강했고, 또 이를 강조하여 왔기 때문에 신도수가 급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은 강하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 알아들으려는 의지는 약하다고 여겨진다. 불교 교인들이 염불의 내용과 의미는 전혀 모르면서도 염불을 듣는 것 자체로 불심(佛心)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대개의 평신도들은 성경 말씀의 내용과 뜻을 알려는 의지는 부족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라(롬 12:3)고 했음에도 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분별하려는 신앙적인 열정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져보는 일을 꺼린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을 좋은 믿음으로 칭찬한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불면증 환자에게 의사가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호흡을 가다듬고 일에서 백까지를 천천히 헤아리면 잠이 들게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환자는 의사의 말에 따라 숫자를 천천히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88, 89, 90을 헤아리는 동안 잠이 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까지 헤아려 보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졸음을 참으며 백까지를 헤아리는 동안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 환자는 이튿날 의사에게 당신 말대로 하니까 잠만 달아나더라고 불평했다는 이야기이다. 환자는 의사의 말을 잘 듣기는 하였지만, 그 말 뜻을 알아 듣지 못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도 그 말씀의 뜻을 알아 들는 것이다. 말씀의 뜻을 헤아리려면 문자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때로는 비판적으로 그 뜻을 따져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말을 잘 듣는 다는 것을 말귀를 잘 듣는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생기고,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 나아가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데에서 믿음이 생기고 자라고 열매 맺는 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말씀을 읽고, 쓰고 사모하면서도 그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데에는 힘쓰지 않는다. 염불을 외거나 듣듯이 다만 성경을 읽고 듣는 것 자체를 신앙의 덕목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교회는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약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생명력이 고갈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십일조(Complete Offering):; 거룩하게 바치고 거룩하게 사용하기

한국교회의 신앙덕목 중에 다른 하나는 십일조이다.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는 이가 참 신앙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 독일 교회는 십일조 대신 종교세를 내고 있으며, 영미의 교회는 십일조를 구약의 율법이라 하여 강조하지 않는다. 한국 민중종교의 전통에는 지극정성의 표시로 복채를 내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이런 종교전통 때문인지 몰라도 한국교회는 유독이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이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기꺼이 힘에 부치도록 헌금을 바친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의 재정능력이 튼튼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거룩한 십일조를 바치면 축복을 받는다는 것(말라 3:10)만을 강조할 뿐, 어떤 것을 바치는 것이 그리고 거룩하게 바쳐진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거룩한가에 대한 진지한 신앙이 부족하다. 말라기 선지자도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말라 2:13)을 바치는 것에 대해 책망하였다. 십일조를 바칠 때에는 반듯이 흠 없고 깨끗한 것을 바치라고 명하였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신명 24:18)은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매 삼년마다 바치는 십일조는 성읍에 저축하였다가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개과 고아와 과부를 먹이는 일에 쓰도록 하였다(신명 14:28-29, 26:12, 레위 27:30).

거룩한 헌금이라 정직하게 번 깨끗한 돈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고, 또 이 돈을 교회가 거룩한 일에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뇌물로 받은 부정부패한 돈을 바치는 것이 거룩한 헌금일 수 없으며,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귀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거룩한 헌금으로 교회의 건물을 짓다가 부수어 버리고 다시 짖는 일에 낭비하여서는 않되는 것이다. 거룩한 헌금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정신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교회 자체를 부를 축척하게 되고, 교회의 물량화를 부추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수도사들은 한결같이 청빈과 구제를 강조하였다. 적게 소유하고 많이 나눠주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교회자체가 많이 소유하는 교회, 적게 나눠주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의 재정의 여유가 생기는 증축에 급급하였으나 건축이 후에는 기도원이나 수양관 건립과 교회묘지 구입 등 자체 소비 치중하고 있다. 거룩한 헌금은 교육과 선교와 구제에 위하여 거룩하게 사용하기 되어야 한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근원적인 악덕이며, 정치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 뿐 아니라, 생태계 파괴와 오염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도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는 악덕을 쫓아가고 있다. 교회가 세속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 교회치장에 열심을 다하다 보면 자연히 그 영적 생명력은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이 2,000년 교회사가 가르쳐 주는 상식적인 교훈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영성회복을 위해 십일조와 더불어 청빈과 구제를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5) 개인전도(Salvation for one by one) : 신앙의 의식화

한국교회는 개인전도로서 노방전도, 축호전도, 문서 전도 등에 열심이다. 귀한 일이자. 그러나 이런 전도를 받고 교회에 처음 출석한 사람들의 관리와 양육이 너무 소홀하다. 그래서 앞 문으로 들어온 초신자들이 뒷문으로 빠저 나가기 때문에 󰡔뒷문을 막아라󰡕는 전도 방법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전도와 선교의 일차적인 목표는 신앙의 의식화이다. 불신자가 처음으로 교회에 왔을 때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의식화교육은 가장 단시간에 문제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필수 불가결적인 지식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제일 처음 교회를 방문한 초신자에게 무엇으로 신앙의 의식화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시적인 신앙의 대상, 다시 말하면 가시적인 축복의 통로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기도이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성자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접하여 교제하고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구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스스로 기도할 수 있을 때 신앙이 생기고 신앙이 자라고 신앙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주기도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 율법의 말씀과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 따라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 신앙의 원초적인 진술이 이 성경을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믿음에 생기고 믿음이 자라고 믿음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마침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책을 주고 그 책을 스스로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교회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 하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를 믿는 자들은 교회를 어머니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어야 신앙이 생기고 신앙이 성장하고 신앙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마침내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교회에는 흠과 티와 가라지가 있지만 그러나 이 교회가 하나님이 피로 갑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구원에 방주이므로 물고기가 물이 조금 오염되었다 하드라도 그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 살 수 없으므로 일평생 교회를 떠나지 말라는 것을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주일에 꼭 예배에 참석하도록 신신당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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