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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로 바뀌어가는 영국교회(-Strategic Missionary Approach to Reverse Mission to Europe)

영국사회와 영국교회 바로 알기(1)


1. 현대 영국,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영국은 과거 19-20세기 세계기독교 선교사에 큰 공헌을 했다. 더불어 세계교회 부흥운동사에 있어서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쳤다. 우리는 영국 교회가 낳은 선교사들 가령,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와 같은 인물, 그리고 존 웨슬리(1703-91),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92) 등과 같은 역사적인 부흥설교가를 기억하고 있다. 특히 적지 않은 한국신학자들이 한국교회 신앙형태를 ‘웨슬리적 정열과 청교도적(puritan) 윤리’로 규정하리만큼 영국교회의 영향력은 비단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서 짙게 배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영국에 대해서 ‘부요한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러한 판단과 다르다. 과거의 화려한 역사와 기독교문화의 유산이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국 역시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쇠퇴를 보이는 기독교후기시대에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현실적 판단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제 영국은 과거의 화려한 기억 속에 살면서 현실을 방관하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2. 영국교회 현실

미국의 기독교사회학자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는 기독교역사에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했던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현대 영국교회의 얼굴을 ‘관광명소’로 표현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리스로 전했으며, 그리스인들은 기독교를 철학화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로마로 전했으며,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제도화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영국으로 전했으며, 영국은 기독교를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미국으로 전했으며, 미국인들은 기독교를 기업화했다.”

[Christianity was born in Palestine. They took it to Greece and they made it into a philosophy. They took it to Rome and they made it into an institution. They took it to England and they made it into a tourist attraction. They took it to America and they made it into a business enterprise.]


영국의 크리스천 리서치(Christian Research)의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영국에는 해마다 약110개의 교회들이 개척되고 있다. 반면, 해마다 220개의 기존 교회들이 폐쇄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경우, 5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약 5,500개의 교회들의 평균 회중의 수는 단지 10명에 그치고 있다. 물론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전략적으로 개척된 교회들 가운데는 성장을 경험하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인 영국교회의 형세는 낙관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어느 종교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며 몇 가지 선택사항을 제시한다면, 이들은 대부분 ‘무신론자’라고 표시하는 것을 주저한다.


보통 영국인의 약 70퍼센트(2004년, 통계에서는 약 75%)는 역사적, 문화적 이유들로 ‘크리스천’ 이라고 표시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것은 영국의 총인구 약 5,800만 가운데 약 7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허황된 통계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작용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오늘 영국에서는 인구의 약 7%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이 수치에는 모든 교단들이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도 포함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7%) 가운데 약 30%만이 ‘거듭난 신자’ 혹은 ‘복음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 아마 영국 전체에서보다 서울시내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3.영국사회 현실

과거 기독교 부흥의 역사와 궤를 함께 했던 일반 역사 속에서, 영국은 이미 오늘의 영적 위기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다.


근대 계몽주의의 실제적인 열매는 특별히 영국사회에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특히 영국산업혁명이 일으킨 근대 이후 생활양식의 변화와 함께 과학과 이성주의의 아들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의 진화론이 가진 정신사적 영향력은 영국교회의 영성을 잠식할 만큼 대단했다.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가 직면했던 참상 앞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주의는 더욱 깊어졌으며, 이 모든 위기는 1960년대 이후 반문화로 통하는 세속주의의 얼굴로 드러났다. 결국 다른 서구사회의 조류와 궤를 함께 하며 영국사회 역시 기독교 신앙과 단절된 사음(死陰)의 골짜기에 들어섰던 것이다.


오늘 영국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윤택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물론 2,3세계 국민들에 비해 사회복지제도 혜택을 좀더 받을 수 있으며, 식탁에 앉아 좀더 따듯하고 질 좋은 빵과 버터와 우유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현대 영국이 직면하고 있는 영적 위기를 비유하자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가 적중할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과학과 이성과 관능을 숭상하면서 영적인 감각과 시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한 자리에 허깨비라도 올려놓고 의지해야 하는 그런 존재이듯이 이들은 마시기를 계속 해도 목마른 세상의 짠물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해 영국인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가치상대주의, 다원주의, 개인의 경험과 감성에 기초한 개인주의적 가치판단을 삶의 중심에 모셔놓고 주연을 벌리면서 영적인 빈곤과 외로움 가운데 방황하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으로부터 단절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영국사회는 심각한 가족윤리의 위기를 맞고 있다. 가족간 유대관계가 비교적 느슨한 서구사회에서 결혼과 가족을 둘러싼 성규범의 혼란은 시대적인 위기다. 영국사회의 가정 내부의 현실을 들여다 보자면, 해마다 10여 만의 가정들이 이혼을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4년을 기준으로 166,600여 가정이 이혼했다. 이 수치는 초혼과 재혼에 실패한 경우를 포함한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호하는 경향이다. 2004년 기준, 결혼하지 않은 동거가족(cohabiting couple families)은 약 2백2십만명으로 통계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마약과 알코올 문제는 현재 가장 큰 사회적 이슈들 가운데 하나다. 현재 영국 정부는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마약과 알코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영국인구 중 16-29세 청소년들 가운데 남성 35%, 여성 24%가 마약류를 접하고 있으며, 2004년 정부는 마약중독증을 가진 청소년들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예산으로 약 8백 7십만 파운드(한화 174억 원)를 지원했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버밍햄의 경우, 총 지원금 가운데 할당된 액수는 치료관련기관을 지원한 액수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높은 약 6억원으로 나타났다. 2004년 국내 850개의 마약중독 치료센터에서는 160,050명의 마약 환자들이 치료 프로그램에 합류했고, 그 중 29%만 치료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마약 환자들의 수는 해마다 약 20%이상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버밍햄의 경우, 2004년 마약 남용자 가운데 12,986명이 공식 치료 프로그램에 합류했고, 그 가운데 치료에 성공한 이들과 중도 탈락자들 이외에 59%는 지속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알코올의 경우, 국내 연간 알코올 소비액은 14조 6천억원(7,3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천문학적 수치를 보인다. 맥주의 경우 연간 생산량은 약 59억 리터이고, 하루 소비량은 약 1천 6백만 리터에 달한다. 경찰청의 통계에 의하면, 연간 폭력사건의 20%는 술집과 클럽에서 발생하며, 그 가운데 70%는 주말에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위 주말에 이뤄지는 ‘빈지 드링킹(binge drinking, 暴飮)’은 현재 영국의 사회문제로 크게 떠올라 있다. 알코올 중독의 문제는 마약 중독의 문제와 궤를 같이 하며, 영국 정부는 이에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사회 내부를 보다 깊이 관찰하며 경험할수록 암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복지국가 혹은 선진국가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규범을 포기하고 세속주의 정신에 깊이 물든 영국은 무질서와 혼돈의 시대에 들어섰다. 더욱이 교회는 사회갱신을 위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구책(自救策)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현재 상황은 18세기 영국사회의 모습과 아주 닮은 데가 많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경우 영국교회와 영국사회는 희망이 없다. 전국 도처마다 교회갱신, 교회부흥, 교회성장에 관한 세미나 혹은 대형집회는 홍수를 이루고 있고, 정부와 비정부기구들이 제안하고 시행하는 사회정책은 해마다 새로운 얼굴을 갖지만, 영혼과 삶, 그리고 사회를 말씀으로 바르게 쪼개며 회개의 참된 자리에 나아오도록 소환하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과 실천적 능력이 넘치도록 하는 진정한 부흥다운 부흥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 세대를 뒤바꿀 수 있는 그런 대각성과 부흥이 오지 않는 한 참으로 영국은 희망이 없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영국교회와 사회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보다 직접적으로 부흥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현실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지적했던 존 웨슬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제의 말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인 것이다.


“무엇이 영국의 현재적 특징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음(不敬, ungodliness)이다. 하나님 앞에 불경스러움은 우리의 보편적이며 변치 않는 별난 성격이다”


문제는 영국교회와 영국사회의 퇴보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문화적, 종교적으로 다원화 사회를 형성하게 된 영국의 역사 속에 또 다른 도전들이 배태되어 있었음을 보아야 한다. 16세기 이래 식민지 개척에 나선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다져진 새로운 기술과 함께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만큼 세계 열강들과 궤를 같이 하며 제국주의 노선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영국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와 같은 대륙에 진출하여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와 같은 정치력의 확장은 이것을 뒷받침 하고 있던 ‘3-Cs’라고 하는 슬로건과 맞물려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Christianity), 무역(Commerce), 문명화(Civilization)를 통하여 자국은 물론 타국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강자들의 대의명분이며, 식민을 당했던 약자들의 역사 해석은 이들의 논리를 얼마든지 전복시킬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이 시기에 영국교회 안에서는 근대선교를 이끌기에 충분한 선교단체들을 조직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들 단체들은 기독교를 각 대륙에 전파하여 세계화 이루는 데 시대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동일한 역사의 상황 속에 일어나고 있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야 했다.


영국은 식민지 국가들의 개화를 위해 인재를 발굴해서 영국의 교육과 정치를 배우도록 영국 본토로 유학의 길을 열었고, 또한 해상무역에 필요한 수많은 노동력을 식민지로부터 수급했다. 이것은 식민지 국민들의 영국 이주(immigration)를 의미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필요로 했던 병력수급을 위해 기존의 지원제를 변경하여 18세부터 41세 사이의 모든 남성들을 대상으로 군역을 의무화(compulsory military service)했다. 이것은 영국 내 산업현장의 노동력을 병역에 위치시킨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여성 노동력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워야 했으며, 수많은 해외 노동력을 식민지로부터 수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사회시설을 재건하고, 산업시설을 재정비하면서 노동력의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60년대까지 비교적 느슨한 이민법을 통해 해외 노동자들을 대거 유입시켰다. 대체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사회시설 복구를 위해 수급된 해외 노동력만 거의 90만 명을 넘어서고 있을 정도다.


이후 해외로부터 영국에 찾아 든 이민자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현재, 영국 본토인들을 제외한 외국인 이민자들의 수는 약 470만 명에 이른다. 대체로 이 해외 노동자 이주민들은 과거 대영제국(British Empire)에 속했던 영연방국가들(Commonwealth countries), 즉 서인도제도(West Indies), 남인도(South India), 파키스탄(Pakistan), 방글라데시(Bangladesh), 서아프리카(West Africa) 등지로부터 일과 생존을 위해 왔다. 여기에 인권과 생존권의 보호를 호소하며 영국에 들어와 정부로부터 정착을 허락 받았거나, 망명을 신청하고 있는 해외의 피난자들(refugees), 불법 체류자(illegal immigrants, 87만 명으로 추산), 그리고 유럽연합(European Union)의 멤버 국가들로부터 일자리를 찾아 온 유럽인들의 수를 합한다면, 영국사회 안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수는 6백만을 훨씬 넘어선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영국 주변의 서유럽 국가들, 예를 들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역시 비슷하다.


그런데 이같은 수많은 해외 이주민들의 이동은 단순히 수동적인 노동력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인들이 가진 문화와 종교와 생활방식을 그대로 영국사회에 들여와서 오늘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영국사회를 다인종(multi-racial), 다종교(multi-religious), 다문화(multi-cultural) 사회, 즉 다원화 사회(pluralist society)를 형성하도록 한 주도적 세대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버밍햄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 중서부 지역과 맨체스터, 리버풀, 그리고 카디프, 스완지 같은 항만이 있는 잉글랜드 및 웨일즈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정착했다. 이들은 비록 전체 영국 인구 가운데 약 1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 민족들(ethnic minorities)이지만, 서구유럽사회가 표방하는 박애주의(philanthropism), 평등주의(egalitarianism), 관용(tolerance)의 기치 아래 이들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가지며 자유(liberty)와 인권(human right)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현대적 위기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는 것은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정치화 된 무슬림 공동체(Muslim community)의 세력이다. 영국에서 무슬림의 수는 대략 200~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잉글랜드 중서부의 주 도시인 버밍햄의 경우, 유럽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선교활동 역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계제에 도시의 적지 않은 교회들은 교인수의 감소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해외 이주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게 교회당을 예배처소로 세를 주거나, 혹은 불행하게도 힌두교도들(Hindus)이나 시크교도들(Sikhs)에게, 아니면 무슬림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용도를 위해 매각 처분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버밍햄의 경우 한즈워스(Handsworth), 스파크힐(Sparkhill) 등지에서 이교의 사원들로 돌변해 있는 옛 교회당들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대도시들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민의 행렬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과 준비되지 않았던 영국교회


해외로부터 오는 이민자들의 행렬은 영국교회에 단순히 문화적, 종교적 위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일련의 이민역사 가운데는 영국교회가 겸손히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었다.


맨체스터대학교 종교신학부의 존 아더톤(John Atherton) 교수는 부정할 수 없는 영국교회의 심각한 침체현상 가운데서, 특별히 1960년대 이후 영국교회를 지탱시키고 새로움을 더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흑인교회들(Black Churches) 가운데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이같은 은총은 서인도제도(West Indies: Caribbean Islands)와 서아프리카로부터 온 흑인 그리스도인들의 행렬 속에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이들 흑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영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기독교의 흐름 가운데 두 가지를 들면, 그 하나는 20세기 초에 기원을 둔 오순절운동(Pentecostal Movement), 또 다른 하나는 19세기 중반 미국 감리교에 뿌리를 둔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 될 것이다.


서인도제도와 서아프리카 본토로부터 빈곤한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영국으로 건너온 흑인 이주민들의 대부분은 열정 있고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영국에 올 때 자신들을 위해 소위 흑인교회를 따로 형성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영국에 도착하여 영국사회와 교회를 경험하면서 곧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던 영국사회, 영국교회가 아니라는 점에 크게 실망하며 상처를 받게 되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러했다.


△다른 예배 스타일(Different Worship-style)=흑인들은 영국교회의 보다 형식적인 예배와 시간에 크게 구애를 받는 예배,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는 교회강단, 예를 들면 생명을 살리는 성경의 해석보다는 성경에 비평을 가하는 태도에 실망했다. 그리고 이름뿐인 신앙의 모습에 직면하면서 흑인들은 시들어가는 영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에 대하여 실망했다. 특히 짧은 예배 시간에 익숙한 영국교회 예배에서 일반적으로 흑인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배 특성들, 가령 회중과 설교자의 호응, 개인간증의 기회들, 찬송가와 후렴구들을 반복해서 부르기, 자발적인 기도, 그리고 결단을 호소하며 강단으로 회중들을 초청하는 부름 등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으며, 심지어 소리를 높여 찬양하는 것까지도 금지했다.


△외면되는 흑인들의 특별한 필요들(Particular needs ignored)=대부분의 영국교회 회중들은 흑인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히 이들은 영국인 회중들 속에서 소속감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영국인 목회자들로부터 충분한 목회적 돌봄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회중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고 돌아가라’, ‘너희가 참석할 수 있는 교회는 따로 예비되어 있다’고 말하는 목회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흑인 형제자매들은 영국교회로부터 충분한 영적 양분을 공급 받을 수 없었다.


△인종차별(Racism)=흑인들은 교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터와 거리, 이웃들로부터 주어지는 암시적, 노골적인 차별을 받아야 했다. 백인들은 흑인들과 함께 앉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이처럼 대다수의 흑인들이 영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경험한 냉담과 적의와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보인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끝까지 신실한 모습으로 영국 회중들 안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 땅, 그리고 본인들이 참석하고 있는 교회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이들은 순종과 인내의 믿음으로 신실한 증인이 되었다. 둘째,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나 세상의 길을 따라 나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셋째는 1950년대 초기부터 백인교회들로부터 나온 흑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흑인독립교회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거나 모국교단의 지교회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흑인교회들은 성장추세를 보이며 마치 제 3세계 교회들이 세계 교회 현장에서 목소리를 얻고 있듯 영국 내 다른 교단 및 종파들과의 관계에서도 간과될 수 없는 목소리를 얻고 있다.


개인적으로 평가해 본다면, 영국교회가 급격히 내리막길에 들어선 20세기 중반에 흑인 그리스도인들(Black Christians)이 영국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단순한 노동력의 수급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인 흐름 속에 놓인 하나님의 손길과 뜻을 묻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영국교회는 당시 흑인 그리스도인들의 행렬 속에 함께 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국교회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처한 영적 빈곤을 정직하게 보는 눈이 없었고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 온 흑인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하며 그들을 통하여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영국교회 백인회중들 가운데 함께 하고 있는 흑인 형제자매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 땅을 향해 나섰을 때 주님께서 그들 위에 두신 뜻이 무엇인지 역사적인 안목에서 보아야 할 필요를 알았다. 영국 땅에 정착하여 이민 2세와 3세까지 본 흑인들과 그들 자손들에게 꼭 상기시키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들과 이들의 선조들이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서 경험한 오순절적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과 영국교회를 용서할 뿐 아니라 영국교회를 살리는 일에 참여하도록 권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안목과 영적 질서 가운데서 해석된 삶과 고난이야말로 자신은 물론 타인을 견고히 세우며, 사회와 교회를 치유하는 힘이 되는 까닭이다.




박창수선교사 (Chang S. Park)

전략적인 유럽역선교(逆宣敎)

콜 밸리 클러스터(Cole Valley Cluster of Churches in East Birmingham) 협력선교사

제자도 및 기독교 영성 강사(Kingfisher College)

버밍햄 퀸즈 칼리지(MA Dip.)

서울신학대학교/ 동 신학대학원(BA/ M.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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