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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 신학(Process Theology)

과정 신학의 원조로서 우리

는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로마 천주교 철학자인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

(Pierre Teilhard de Chardin)과 하바드와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가

르쳤던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이다. 이 둘 중에 과정 신

학이라는 독특한 신학 체계에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화이트헤드라 하겠다.

그러므로 과정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먼저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번호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을 논하고 다음

호에서 과정 신학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과정 철학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이

고 사변적이라 하겠다. 어떻게 들으면 너무 허황되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처

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과정 철학과 과정 신학

이 곧 사향길로 접어 들 것 같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다시금 그 영향력

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생태계 신학과 그 발을 맞추고 있고, 종교

다원주의의 큰 이론적, 신학적 근저가 되고 있다. 과정 사상이 포스트모던이

즘과 어울리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세계는 부정되고 정체적

(static) 실체의 존재를 부인하고 모든 것이 항상 변화되고 상대적이라는 주

장이 포스트모던이즘과 잘 어울리는 주장인 것이다. 더욱이 모든 존재하는

것, 심지어 인간까지도 어떤 물질의 구성에 불과하는 과정 사상은, 즉 어떤

미물과 인간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과정 사상은 현재 급속도록 발전하고

있는 유전공학, 로봇 공학, 컴퓨터 공학, 유기화학 등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과정 사상을 단순히 허무맹랑한 궤변이라

고 하기에는 중요한 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유기적 원자론"(organic atomism)이라 불리우기도 한

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세상, 인간,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현실체"(actual entities)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현실체

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새로운 현실체들을 만들어 가며 과정한다

고 주장한다. 또한 이 현실체들은 자창적이며 서로들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고 주장한다. 한편 현실체들은 과정됨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를 잃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현실체들과 관계성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체는 일종

의 "경험의 부스러기"(drops of experiences)라고 한다. 즉 죽은 요소가 아니

라 유기적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체를 "현실사건"(actual occasions)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시간적 과정을 이루는데 이것

을 "외부적 과정"(external process)이라 하고, 또한 내부적 과정(internal

process)이 있는데 이것을 합생(合生, concrescence)이라 한다. 이것은 현실

체 자체속에 외부에서 비쳐지지 않는 비시간적(nontemporal) 순간 과정으로

구체화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모든 관련된 현실체들은 서로 엉크러져 새

로운 현실체를 생성하는데 이 생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합생이라고 하는 것이

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신도

포함하여) '물질적 극'(physical pole)과 '정신적 극'(mental pole), 양극성

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편 물질적으로 느끼지 않는 요소들, 즉 어떤 형상

(form), 관계(relation) 질적인 것을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라 하는

데, 이것은 현실체가 아니라 어떤 경험에서도 실현될 "순수한 가능성"이라고

한다. 또한 현실체들이 무엇이 되려는 것을 '주체적 겨냥'(subjective aim)이

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창적 현실체들의 과정에 있어서 그 '주체적 겨

냥'의 시작은 하나님(신)에 의해 개념적으로(conceptually) 성취되는 질서로

부터 부여받는다고 한다. 이것을 "최초겨냥"(initial aim)이라고 한다. 神 역

시 양극성을 지니고 있는데, 물질적 면을 "결말적 성품"(consequent nature)

이라 하고, 정신적 면을 "원초적 성품"(primordial nature)이라고 한다. 결말

적 성품은 의식적이고 神의 본질의 일치를 위한 '세상의 현실화'(the

realization of the actual world)를 의미하고, 본질적 성품은 개념적

(conceptual)이고, '현실적으로 부족하고'(actually deficient) 비의식적이

라 한다. 이런 양극성의 神은 또한 양극성의 세상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존재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神의 원초적 성품은 모든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결말적 성품은 현실화 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런 의미에서 신과 세상은 똑같이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로의 존재를

위해 神은 세상을, 세상은 神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창조

성"(creativity)이다. 화이트헤드는 말하기를 "창조성은 많은 현실체들이 하

나의 현실체가 되는 과정의 궁극적 원리이다"라고 한다. 창조성은 일종의 보

편적 개념이라 하고 그 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반드시 현실체를 통하여

그 특성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神

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고 창조성이 궁극적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神은 창조성

의 "無時的 우유성"(non-temporal accident)이라고 한다.



이제 과정 신학이 무엇인지 살펴 보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과정 신학이란 과정 철학의 개념

들 위에 신학적 용어들로 옷 입히운 것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과

정 신학의 주장들을 신학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적 차원에서 이해

해야 한다. 물론 과정 신학자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겠지만 우리로서는 조심해

야 할 요소이다. 아마도 과정 신학의 핵심은 神觀에 있을 것이다. 소위 과정

신학의 신관을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과정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하트숀(C. Hartshorne)이 만든 말이다. 즉 모든 만

물이 神안에 존재 한다는 것이다. 물론 범신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범신론의

신은 세상과 구분하기 힘들지만, 지난 호에서 설명하였듯이 과정 철학 혹은

신학에서의 신은 세상과 서로 상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상호적 관계는

서로 독립된 존재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신 없이 세상이 존재할 수 없고, 세

상 없이 신이 존재할 수 없는 그러한 필연적, 존재론적 관계이다. 이러한 신

은 바로 세상과 같이 고난을 같이 하고 운명을 같이 하는 친근한 신으로 묘사

되기도 한다.


이런 세상과의 친근한 신 개념 때문에 과정 신학은 해방 신학에 어떤 형이상

학적 원리를 제공했다고도 말한다. 더욱이 과정 신학자들은 과정 신학이 종

교 다원주의나 생태계 신학과 같은 포스트모던이즘에 어떤 사상적 기초를 제

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신론만큼 과정 신학의 중요한 주장은 바로 기독

론이다. 사실 과정 신학의 신론은 과정 철학의 형이상학에 불과하지만 기독론

에는 그래도 나름대로 신학적인 특징을 자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여

기서 과정 신학의 대표 주자인 죤 콥(John B. Cobb, Jr.)의 기독론을 살펴보

도록 하겠다.


먼저 콥은 그리스도를 "창조적 변혁"(creative transformation)으로 정의한

다. 이것은 참으로 특이한 정의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어떤 이상적 인격

체 혹은 실체적 존재 혹은 정신적 영향력 등으로 정의하지 않고 '창조적 변

혁' 자체를 그리스도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과정 철학을 잘

대변하고 있는 정의인 것이다. 즉 과정 철학에서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

(substance)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계속되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변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

이다. 콥의 "창조적 변혁"이라는 것은 그의 다른 그리스도 개념들(예를 들

어, 사랑, 희망)과 같이 바로 '가능성'(potentiality)과 '현실성'(actuality)

이 동시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가능성만을 이야기할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

이 되는 것이요, 현실성만을 이야기할 때는 변하지 않는 정수가 되는 것이

다. 그래서 두 가지가 다 포함되면서 세상에서의 '창조적 변혁' 자체가 그리

스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바로 신의 "원초적 성품"(premordial nature)과 연결된

다. 지난 호에 설명하였듯이 화이트헤드에 따르자면 신의 원초적 성품은 신

의 양극성(dipolarity) 중 '개념적 극'을 의미한다. 그 성품은 '무의식

적'(unconscious)이며 '현실성이 결여된 것'(lack of actuality)이라 하며 오

직 '개념적'(conceptual)이라고 한다. 콥이 이러한 하나님의 원초적 성품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이유는 다름 아닌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성육신 교리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누구 혹은 그 무엇

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콥은 그리스도를 또한 "최초 겨

냥"(initial aim)이라고 정의한다. 즉 현실체들(actual entities)에 의한 세

상 과정의 의지 혹은 출발은 신의 '원초적 성품'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을 과정

철학에서는 '최초 겨냥'이라고 한다. 바로 콥은 이러한 개념과 기독교의 성육

신 개념과 연결시켜 그리스도를 정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비판하고 넘어가자면, 그리스도를 '창조적 변혁'으로 보는 콥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러한 정의는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두

말할 나위도 없지만 과정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콥은 '창조적 변혁'을 말할 때 과정 철학의 '창조성'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과정 철학에서 여러 현실체들이 하나의 현실체가 되는 과정의 궁극적 원리가

창조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창조성은 반드시 현실체를 통하여 알려지

고 현실화된다고 주장한다. 비록 콥은 '가능성'과 '현실성' 합해진 개념으

로 '창조적 변혁'을 말하지만 이것 역시 현실체를 떠나서는 알려질 수도 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현실체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

는 것이다. 비록 현실체의 시작이나 그 과정의 창조적 역할을 그리스도라 정

의한다 해도 그리스도는 현실체 혹은 세상 없이는 존재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콥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역할들은 모순되는 것이다.


즉 콥이 그리스도의 정의 혹은 역할이라고 말하는 '로고스,' '질

서'(order), '신생'(novelty), '지성'(intelligibility), '창조적 이

성'(creative reason), '사랑,' '구속적 힘'(redemptive power), '살리는

힘'(life-giving power) 등은 과정 철학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왜냐면 이러한 역할은 '창조성'이나 신의 '원초적 성품'에서 있을 수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즉 과정의 양극성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과정 철학에서는 '창조성'(creativity)과 하나님을 동일화하지 않는다. 둘을 동일

화하면 어떤 실체(substance)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불변의 존

재를 인정하고 다원론이 아니라 단일론(monism)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추상성'(abstraction)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현실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화이트헤드처럼 하나님을 '창조성'의 한 예(example)로 볼 경우에는 그 '창조

성'의 근원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다. 그래서 어떤 과정 철학자들은 '창조

성'과 하나님을 동일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창조성의 역할을 그리스

도에게 부여할 경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단지

기독교 교리를 흉내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무엇으로

보고,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창조성'의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은 과정철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콥은 예수를 어떻게 보는가? 즉 그리스도는 '창조적 변혁' 혹은 '최

초 겨냥'으로 정의한다 하더라도 유대인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는 어떻게 보는

가? 콥에 따르면 예수는 현실체(actual entities)들로 구성된 인간으로 그

의 '존재 구성'(structure of existence)이 특별났었다고 주장한다. 예수에게

는 '최초겨냥'(initial aim)이, 즉 로고스가 특별하게 충만히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말이나 행적을 통하여 지금도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의 '객관적 효과성'(objective efficacy)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를 하나님이 아닌 단순한 인간으로 본다면 무슨 근거로 또

한 어떤 기준에 의해 '최초 겨냥'의 임재가 예수에게 불균형적으로 특별히 임

했다는 것인가? 과정철학에 의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에 '최초 겨냥'이 부여되

고 객관적으로 불변하는(objectively immortal) 현실체들이 다른 현실체들을

위한 자료로 주어지고 자체 과정에서 "합생"(concrescence)을 이룬다고 한

다. 만약 예수도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존재라면, 예수에게 있어서 다른 자료

(data)와 합생의 역할은 무엇인가? 즉 어떻게 '최초 겨냥'이 다른 현실체들과

는 달리 예수에게는 충만히 임했다는 것인가? 사실 현실체들은 자창적이며 결

과를 자기가 결정한다고 과정 철학에서는 주장하는데, 왜 예수에게서는

그 '최초 겨냥'이 그의 존재를 좌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

런 예를 인정한다면 과정의 '정규성'(regularity)은 없어지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콥은 예수가 '최초 겨냥' 혹은 로고스로 항상 충만해 있지는 않았

다고 한다. 즉 그가 잠을 잘 때나 어린아이였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다. 특별히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번민할 때는 충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예수같이 로고스가 충만했던 사

람이 어딘가 분명히 있었겠지만, 예수의 경우 콥 자신에게 충분하다는 것이

다. 그렇다면 이런 예수에 대한 비일관성과 로고스가 충만하다는 사실과는 어

떻게 조화가 되는가? 콥은 예수의 혁명적이고 새로움을 불러일으킨 것이 로고

스 혹은 '최초 겨냥'의 특별한 역할이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에 혁명적

이고 새로운 것을 불러일으킨 많은 사람들이 알려졌는데, 왜 그 사람들에

게 '최초 겨냥'이 충만히 임했다고 보지 않는가? 왜 그들도 그리스도라 불리

울 수 없는가? 콥 자신에게는 예수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은 학자로서 무책임

한 말인 것이다. 그는 단지 자신은 과정의 결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믿고

예수가 아니라 과정 실재에 충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콥은 또한 미래적 철학자들(Moltmann, Bloch, Teihard de Chardin 등)과 유심

론적 철학자들의 개념들을 의존하며 그리스도를 또 다른 이미지(image), 즉

희망(hope)으로 정의한다. 콥은 현 실재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 예를 들어,

종교 다원주의, 여성주의, 생태 위기, 범죄, 인종 차별, 가난, 전쟁, 등의 문

제들을 그리스도 개념으로 해결 해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결이 장차 시간

이 흐르면서(과정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런 낙관적 생각은 '창조적

변혁' 개념의 자연적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상 자체가 영원한 것이

고 세상은 하나님의 '결과적 성품'(consequent nature)이라는 주장, 즉 하나

님은 세상과 모든 것을 같이 하는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세상

의 현실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콥의 이런 생

각에 문제가 많다. 먼저 과정철학의 과정이란 어떤 미래적이라기 보다는 현재

의 진행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자료(data)가 주어지고, 자체의 창조적 과정

이 합생(concrescence)으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즉 과정이라는 것은 미래로

이어지지만 그 과정은 미래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희망의

철학자들은 미래 혹은 약속(promise)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의미와 근거를 제

시하려 하지만 과정철학은 단순히 어떤 비시간적 가능성만을 이야기 할 뿐이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정의하는 것은 과정철학의 성격과 맞지 않

는다.


결론적으로 과정 신학은 기독교 교리에 과정 철학의 용어와 개념들로 옷을 입

힌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작업에 많은 모순들이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과

정신학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자기들의 과정 개념으로 억지로 재해

석하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위배되는 것이요,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적 관용을 기독교에는 베풀지 않는 것이다. (정승원 교수 합신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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