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셋째 날에 막14장 53-66절까지... 두 가지의 스토리 중 하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붙잡혀 가시는 중에 뫠 멀찍이 쫒아 갔을까...
왜 멀찍이 따라만 가야 했을까...
한 몸을 이루었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사도로 부름 받은 주의 종이었는데...
왜 멀찍이 떨어져 대제사장 뜰 안까지 들어가는가 ...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 나마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밤중이었기에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이 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환하게 주위를 밝혔주었고
불이 더욱 밝아지자 베드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이 밝은 불빛 때문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베드로의 염려에 맞추어 주목하여 지켜보는 한 여 종 있었는데 그가 베드로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한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을 이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사람 잘 못 봤다. 자기는 예수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 는 거다
자신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른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이렇게 시인한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목숨을 걸고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대제사장에게 밝힌 예수님과 달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 베드로는 단호하게 예수님을 부인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참으로 비겁했다.
마26:70절에서는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 자기를 주목하는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윗 뜰에서 예수님이 진실을 말하던 그 시간 아랫 뜰에서 베드로는 진실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앞뜰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이 앞뜰은 거리로 나서는 아치형 출구가 있는 쪽의 공간을 말한다. 이 자리는 예수님이 있는 쪽과 반대 방향이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과 더욱 멀어져 간다.
여차하면 그는 이 문을 통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베드로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남은 사랑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그 문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때 그 여종이 다시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했다.
도당이라는 말은 ‘한 패’라는 말이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는 베드로의 태도에 더 수상함을 느꼈던 여종이 한 말이다. 이때 베드로는 또 다시 예수님을 부인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억양을 듣고 갈릴리 사람인 것을 눈치 첸다.
그러면서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고 했다.
죽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예수와 살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점점 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제 베드로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극도의 수단을 취한다.
이 수단은 저주와 맹세였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1절)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극복한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예수님과의 거리를 두고 따라 간 베드로는 조금 떨어진 아랫뜰에서, 그리고 앞뜰, 그리고 대문 밖으로 더 거리가 멀어졌다.
이런 거리의 간극은 예수님에 대한 불완전한 사랑을 말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면 이런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실감하게 된다. 베드로는 위험과 어려운 상황이 자신에게 닥치자, 그 자신의 맹세와 결심과는 달리 주님을 배반하게 되었다.
인간 마음의 부패함이 이렇다. 우리는 맹세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신앙은 인간의 의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려 하면 절대 그 부담감과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은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순종하는 것이다.
셋째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생각하라.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베드로의 믿음 없음이 본 단락에서 명확하게 대조가 된다. 똑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떻게 예수님은 강인할 수 있었고, 베드로는 넘어졌을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 당연히 강하지 않겠나
하지만 우리는 이 순간 예수님도 평범한 사람의 몸을 입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이나 베드로나 별반 차이가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렇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뜰까지 와서 심문을 받기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안에서 기도하셨는데 땀방울이 핏 방울처럼 흐리시기까지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었다
"시험들지 않게 기도하라"
"깨어 기도할 수 없었더냐"
기도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도 죽음을 이긴 것을 보여 주신 것이 기도다.
잠든 자기 영혼을 깨울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우시고 충만케 하시는 것이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간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