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의 마지막 날,
성 금요일 새벽은 막15:1-15절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이 증거되었다.
이 날 예수님은 당초 산헤드린이 내세운 신성 모독의 죄가 아닌, 정치 범으로 국가에 대한 반란 자요, 대역죄를 빌미로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 종교에 관계된 문제여서 처형의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이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빌라도는 종교적 문제라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와서 죄명을 바꾸게 된다
빌라도가 이 사건을 맡고 예수에 대해 접수된 고소의 내용을 살펴보니 별의 별 내용이 다 있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1)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2) 예수가 로마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
3) 자기가 자칭 왕이라고 떠들어 댄다.
빌라도가 보기에는 사실 이런 내용들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를 보니, 이 사람은 암만 봐도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따르는 조직된 군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빌라도가 보기에는 한낱 정신병자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국가 반란에 대한 실체나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
고소가 접수되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질문 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막14장에서 보여주셨던 일관된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셨다..
하지만 자신을 비난하고 험담하고, 모욕하고, 거짓된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비방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잠잠하였는데 반면, 예수님의 정체성, 곧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가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만 답하고 다른 말들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빌라도가 보고 완전히 놀랐다. 성경 개역개정에는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고 했지요. 이를 개역성경에는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일반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이런 기이한 예수님의 행적에 충격을 받았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악마같은 집요함을 가지고 갖가지 비방과 중상모략을 하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 예수는 조금도 요동치 않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이 사람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썼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하지만 이 사람을 그냥 놔두면 유대인들의 민란이 발생하고, 그 소문이 로마에 들어가면 자신이 경질 당할까봐 알면서도 예수를 사형에 처하게 되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의 법에 의해서는 신성 모독 죄의 죄로 정 죄 받았고, 로마인의 법에 의해서는 극형조항인 반역죄로 정죄 받는다.
결과적으로 산헤드린과 로마 당국이 예수님을 죽이는 악한 일에 서로 협력하여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최종 판결자는 빌라도였다는 것을 확실하다.
오늘날 교회가 받을 교훈은 이것이다. 즉 교회가 당할 모든 일은 이미 예수께서 먼저 겪으셨다는 사실이다.
수치와 모욕, 정죄, 비난 이 모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먼저 겪으셨고 말세를 맞이한 이 세대의 교회들이 겪을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날 고난 받는 성도, 수치와 모욕 받는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교회가 받을 고난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 금요일에 불의의 재판을 받았다. 말도 안되는 여론몰이 재판으로 예수님은 사형을 언도 받았다. 분명 예수님의 재판은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믿는 우리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왜냐 하면 그 불의의 재판의 최대 수혜자가 우리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왔나, 바로 불의한 재판에서 왔다. 가롯유다의 고발로 촉발되어 대제사장의 모함에서 있었고, 재판장 빌라도의 안이함에서 나왔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불의한 재판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사실, 이 재판에 대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분노가 아닌 감사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의한 재판이 하나가 아니라 사실은 둘이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재판이고, 또 하나는 바라바의 재판이다.
이 재판 역시 불의하기 짝이 없다.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람이 바라바다. 이 바라바는 당시 국법으로는 당연히 사형 당해야 할 중 죄인이었는데 오늘 이 사람이 무죄로 방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런 엉터리 재판이 어디있느냐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저와 여러분은 그런 말 함부로 할 수 없다.
왜, 이유는 그건 바라바의 재판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재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는 우리의 죄가 더욱 낱낱이 드러나면 우리는 바라바 보다 백배 천배 더 악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이 바라보보다 더 흉한 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바라바에 대한 선고는 무엇인가 무죄 방면이다.
왜 그 바라바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재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주님의 불의한 재판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드려야 한다.
나를 위해 불의한 재판의 희생양이 되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