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스페너, 리챠드 박스터 중심으로
Ⅰ. 서 론
서구문명사에서 17세기의 역사적 중요성은 이미 공인된 것이지만, 17세기의 인류의 진보에 관한 지대한 관심의 초점은 남중부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으로 옮아 간다. 이들 두 나라에서 강단설교가 융성하던 시기가 있었던 반면 그 밖의 나라들은 침체기였다.1) 17세기의 대륙에서 개신교 정통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퓨리탄이즘이 등장했다.2)
이 시기에 교회와 교인들은 종교개혁의 최초의 충격이 사라진 후 교리와 예배와 삶에 있어서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열심의 부흥이 겨울날의 싹이 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Ⅱ. 본 론
A. 필립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 시대적 배경
독일은 30년 전쟁(1618-1648)을 통해 모든 것이 황폐화 되었는데 학문과 예술도 사라졌고, 현학적 무지가 대학의 심오한 지식을 대신하였다. 독일의 모국어는 잡다하기 짝이 없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의 말들의 혼입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외국의 다양한 복장이 유행하였다. 독일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Dargan은 이런 독일의 학문적 빈곤을 지적하면서, 외래어의 혼입에 의한 언어의 변질, 이탈리아의 허식적 문학 양식을 모방한 일부 몰지각한 독일의 저자들과 경박한 프랑스의 문학 양식을 흉내내던 사람들이 전쟁을 몰고 온 황폐와 도덕적 타락에 편승하여 독일 문학에 불모지를 초래하였다.3)
이 시대에 다소 중요한 종교 서적이 저술되었으며, 신학 논쟁은 격렬했고, 수 많은 논문과 교리서가 쏟아져 나와서 실제적인 학문이 완전히 도외시 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시기에 설교 방법에 관한 논문들이 몇 편 남아 있으나, 가치가 떨어지고 메마르고 형식적인 설교 방식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의 저술들이 현학적 분위기에 짓눌리거나 진부한 스콜라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4)
그러나 경건 서적 분야에서는 색다르면서도 훨씬 진보적이었는데 찬송시 부분에서 특히 그러했다. 독일 찬송시의 고전에 속하는 것들이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이 시기에 탄생했고 스페너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아른트, 스페너 이후에 발전시킨 플랑케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설교는 종파들간의 다툼과 견해의 대립 과정에서 험악한 논쟁과 편협한 독단들이 강단에서도 난무했고, 전시대의 스콜라적 경향이 계속적인 해악을 끼치면서 음울한 변증론과 내용이 없는 현학이 영혼을 고갈시켰다. 백성들은 신앙의 섬김을 통한 교훈과 위안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전쟁과 종교의 분쟁 그리고 도적적 몰락은 모든 것을 황폐케 했다. 공허한 논쟁과 현학적 추세와 더불어 이 당시의 설교의 특징은 과장과 환상적 유희를 선호하는 것이었다.5)
그 당시에도 퇴락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죄악과 어리석음을 질책하면서 통탄하는 외침이 있었는데 “오늘날, 사도들의 불의 혀와 타오르는 가슴은 어디에 있습니까? 루터의 활기찬 정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6)라고 외친 크리스챤 스크리버(Christian Scriver)의 외침 속에서 당시의 암울한 시대에 암울한 강단의 건조함을 엿볼 수 있다.
경건주의는 교회의 체제와 예배의식, 그리고 신학체계보다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경험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경건주의의 이런 특징은 퓨리탄의 경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스페너에게 이어지는 경건주의도 목사 개인의 경건한 삶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반응을 신앙의 요점으로 보면서 사변적 신학이론을 기피하고 실천적 삶에 연결되는 교리만을 중요시했다. 이들은 회심과 성화를 강조하면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7)
2. 생애(1635-1705)
독일 강단의 암울한 시기에도 경건하고 복음적인 정신을 가진 설교자들이 있었는데, 17세기 초반부터 불이 기핀 아른트와 후반에 가서 스페너와 그의 경건주의 추종자들의 구역사역이 독일 설교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었다.8) 이제 경건주의 중심에 자리잡은 스페너의 생애를 살피므로 더 자세한 시대적 상황을 살피고자 한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페너는 철저한 루터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알사스 지방의 랍폴스바일러에서 1635년 1워 13일에 태어났다. 경건한 부모들은 태어나면서 그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바쳐 일찍이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주로 그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단하우어와 슈미트(Schmidt)의 지도하에 신학과 일반학을 연구했고 학식 높은 유대인 밑에서 히브리어와 탈무드를 공부했으며, 진지한 지식욕과 항상 부지런히 공부했기에 매우 해박하고 광범위한 소양을 쌓게 되었다. 1660년에 스트라스부르크의 설교자로 위임받았는데 그는 설교는 매우 좋아했지만 목회적 돌봄은 기피했다. 1680년에 삭소니의 선제후의 간청으로 드레스덴으로 옮겨 설교와 집필에 몰두하여 성과를 거두었지만 비방과 공격의 곤욕으로 선제후와 갈라서고 1691년 베를린의 명예직을 받아들였다. 베를린에서 목회적 수고로움에서는 벗어났지만 정기적으로 설교했고 관할 지역 업무를 잘 감독했다. 이곳에서의 삶은 평화스럽고 알찼고 1705년 2월 5일에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갔다.9)
3. 주요작품 : Pia desideria에 대하여
1674년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의 한 출판사로부터 아른트(Arndt)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의 재판에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Pia desideria"라는 제목으로 아른트의 책 서문에 독자적인 논문 형식으로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해 온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경건주의 시초가 된 선언문이 되었고 이것은 1675년 3월 24일 출판되었다. 스페너는 이 책의 부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혁을 위한 참된 복음주의 교회의 경건한 소원"이라고 불렀다. 이 책에서의 스페너의 주장이나 제안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과 삶의 일치 그리고 조화를 중요시 한 것이다.
제1부는 스페너 시대 교회의 결점들을 비평하고 있는데, 당시 사회의 모든 계층에 팽배해 있던 도덕적 방탕함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당시에는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의무는 대체로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 행해졌다. 성직자들이나 평신도 모두가 오류에 빠져 있던 때였다. 스페너는 교회의 비참한 영적 빈곤의 모습과 통치자들의 타락상 그리고 성직자들의 부패와 불신앙을 드러내어 공격하였고, 일반 평민들의 부도덕과 불신앙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게 되며 우리의 선행이나 경건 생활은 구원 얻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믿음'이라는 기초를 든든히 세웠다. 그는 또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말씀을 귀로만 듣지 말고 더욱 가슴속에 침투하게 하여 말씀의 활력과 능력을 받으라고 역설하였다.
제2부에서는 '교회의 보다 나은 조건의 가능성' 곧 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스페너는 제1부에서 밝힌 어두운 교회상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들과 초대 교회들의 실례들은 교회 개혁을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교회가 선한 상태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가?고 묻는데, 이에 대한 스페너의 대답은 물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지상 교회가 보다 좋은 상태를 지니도록 약속하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제3부에서는 교회 내의 올바른 상태 회복 곧 개혁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6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스페너는 ①보다 널리 성경 말씀을 퍼뜨리고 연구, ②기도와 신앙적 교화를 위한 신자들과 목회자와의 협력, ③신앙이나 생활에서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원칙, ④불신자를 대할 때 주장하는 자세보다 사랑과 지혜로 할 것, ⑤경건과 학문을 결합한 신학 교육, ⑥설교의 목적을 영성개발과 내면생활에 둘 것 등을 요청하고 있다.
2) 신학 사상
스페너는 아른트의 설교집 서문에서 “나는 그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요 이득이라 생각되며, 우리의 모든 가르침, 저작, 그리고 설교들이 존 아른트를 따른다면 지금 사람들이 불평을 말하는 것을 자주 옳다고 여기는 것 만큼이나 많은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10)에서처럼 아른트의 영향을 받았다. 스페너를 비롯한 경건주의의 관심은 교회 개혁, 그 개혁의 수단으로서 성경을 강조, 그 개혁이 생활의 개혁까지 연결되어야하며, 경험적인 신앙을 강조했으며, 세상의 부패에 대해 반대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11)
4. 설교세계
다간은 스페너를 독일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 주의 한사람으로 손꼽힌다. 강인하고도 만능적인 지성, 열렬한 지식욕, 그리고 학교 교육과 끈질기고 근면한 학습 습관으로 훈련된 그의 학문적 자질이 설교에서 요구되는 비범성을 충족시켰다. 어려서부터 순전하고 경건하였으며, 섬길때는 신실하고 헌신적이었고, 일할 때는 지칠줄 모르는 근면성을 가지고, 흠잡을 데 없는 인격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성공적 목회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사사로이 돌보는 목회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이 목회 사역을 마지못해 하면서 어색해 하고 기피하려 했다.12)
1) 설교의 특징
그의 설교는 내용적으로는 탁월했지만 수사적 형식과 결말이 결여되어 종종 딱딱하고 메마르기도 했다. 설교상 수사학의 남용에 대한 반동으로 참으로 필요한 설교 형식마저 무시해버린 과오는 있었지만 그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교사였다. 목회사역에 대해 흥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차원 높은 영적 깨우침 때문이었다. 수사학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가 능력 있고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은 설교에 담긴 정신과 내용 그리고 그의 진지한 의도 때문이었다.13)
가. 형식을 과도히 도외시킨 설교였다.
자신의 설교 시에는 필요한 형식을 너무 도외시하여 현학적 기교가 전혀 없는 무거운 논조를 사용했다. 예화를 삼가고 사상과 내용을 중요시하면서 설교가 길어지고 지루하여 듣고 읽기가 수고스러웠다. 그의 논조는 장황하고 무미건조하며 너무 벅차고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 생활에 역점을 두는 실천적인 목표가 제시되는 설교였다.
그의 설교가 무미 건조하고 장황하고 지루했음에도 성공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설교 방식이었던 것 때문과 그의 설교가 진지하고 실천적인 목표가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루터파 입장에 충실했지만 믿음에 의한 의(義)를 가르칠 때는 주안점을 성화 과정에서 믿음의 열매에다 두었으며 순전한 성경적 가르침을 옹호하면서 논지는 교리보다는 오로지 생활에 역점을 두었다.14)
2) 작품을 통해 본 설교이해
가. 설교의 목적
스페너는 설교하는 목적을 청중이 영적생활에 눈을 뜨고 성장해 가도록 하는 것15)이기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경건한 사람들은 많은 설교들 가운데서 적잖이 아쉬움을 발견합니다. 청중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설교하는 자가 학식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내용들로 설교의 대부분을 채우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자주 인용합니다. 서론을 잘꾸미고 구분을 효과적으로 하며 요지를 교묘히 말하나 그 의미가 충분히 숨겨져 있게 하며, 웅변술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모든 단락을 다루고 적절히 꾸미는데 있으며, 자료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청중들에게 생사에 관련된 설교로 말미암아 유익을 줄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선택한 자료를 전개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설교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강단은 어떤 사람의 기교를 자랑해 보이는 곳이 아닙니다. 강단은 주의 말씀을 쉽게 그러나 능력있게 전하는 곳입니다. 설교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이 목적에 맞게 지향해야 당연합니다.16)
나. 요리문답의 내용 설교 강조.
요리문답의 설교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설교자는 요리문답에 싫증을 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제로 설교자가 기회를 가진다면 이전에 사람들이 배웠던 것을 되풀이하여 설교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며, 설교자는 이렇게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17)
다. 설교의 지향점은 속사람과 관계되어야 함
온전한 기독교 신앙이 속사람, 또는 새사람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의 핵심은 믿음이고 이것의 표현은 삶의 열매들이며, 모든 설교들이 이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외적인 귀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말씀이 우리 마음까지 침투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이 그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생생한 감동과 안도감으로 성령의 인치심과 말씀의 능력을 느낄 수 있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세례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세례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은 속사람은 계속해서.....그리스도를 증거해햐 합니다. 성찬....그 속사람이 복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외적인 성전에 있든 없든 속사람이 그 자신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실제 능력은 이 속사람에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설교들은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18)
라. 강해설교의 약점을 지적
스페너는 Pia Desideria 제3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주해설교로 성경을 풀이하며 설교하는 것도 좋지만 교인들이 보다 많은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제안하고 있다.
일정한 본문을 읽고 주해함으로써 회중들을 가르치는 설교에 대해 나는 조금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주해된 구절들에 기초하는 것 이외에는 성경의 의미를 파악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며, 경건의 필요성만큼 실천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그러므로 지정된 구절에 대한 관례적인 설교보다는 항상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성경을 소개하는 일이 잘하는 권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19)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란 설교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토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20)
3) 수사학적기교
그는 과도한 기교(over refinement)와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설교 풍조를 통탄하며 저항했고, 현학적이고 터무니 없는 수식을 일삼는 설교를 비판했으며, 교리적 논쟁과 난해한 학식 과시를 배척했다. 그 반대로 자신의 설교 시에는 기교가 전혀 없는 무거운 논조를 사용했다. 예화를 삼가고 사상과 내용을 중요시하면서 설교가 길어지고 지루하였다. 그의 논조는 장황하고 무미건조하며 너무 벅차고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다.21)
4) 청중 이해
이 당시의 설교자들은 청중들을 고려하지 않으체 설교하는 일이 허다했다. 청중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설교자가 학식있는체 하기 위해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인용하는 그 당시의 설교자의양태를 비난했다. 당시의 설교자와는 달리 스페너는 청중들이 설교를 듣는 것 이외에는 성경을 접할 기회가 없기에 청중들이 성경과의 더 많은 만남을 주선해야 함을 강조했다.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의 구성원을 알고 또 교리와 경건에서 그들의 연약과 성장을 알게 될 때 신뢰하게 되어 설교자들과 평신도 간에 게약이 체결되고 이들은 쌍방의 최고의 유익을 위해 섬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므로 청중의 연약한 상황을 고려하는 설교자였다.
또한 그는 평신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괸해 열심을 내어 자신의 의문점들을 겸손하게 묻고 답을 얻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가지게 해야한다. 그러면 청중들은 짧은 시간에 인격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가정에서 자녀들과 종들에게 더 나은 신앙적인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런 훈련 없이는 계속해서 유창한 말로 전해지는 설교들은 언제나 충분히 그리고 적절하게 이해되지 못한다22)고 말하므로서 청중의 아픔을 알고 그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설교자였다.
5. 역사적 의의
스페너가 독일 설교의 개혁자로 인정 받는 것은 그 자신의 설교의 질보다는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전환기에 절실히 요구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며 그의 지도하에 진지하고 영적인 설교자들의 무리가 일어나서 독일 강단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23)
그는 설교의 부흥을 요구하였으나 자기 설교에서는 설교의 부흥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성서의 내용이 살아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그는 선생들의 현학적인 데로 빠지고 말았다.24) 하지만 그는 대중에게 영합하려는 설교가가 되지 않았고 명백한 형식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몰두와 개인 생활을 통해 새롭고도 역동적인 주제를 설교에 도입하였다. 자신의 충실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실행할 수 없던 이념들은 그의 후계자들의 업적에서 결실을 보게 되었다.25)
B.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 시대적 배경
17세기는 개신교정통주의 시대요 배타적이고 논쟁적인 교파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침체의 시기였지만 영국에서는 청교도의 항거의 역사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 갔다.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성장한 퓨리탄들은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의 예배의식과 관습 중 성경에 없는 것은 무엇이든 다 제거하려 하였고 개 교회에서 말씀을 충실히 선포하고 성례전을 옳게 베풀고 부도덕한 성도들을 바르게 치리하는 경건한 목사를 매우 중요시 여겼다.26)
리차드 박스터의 생애 동안 영국의 종교적 및 정치적 삶은 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영국내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적인 제임스 1세의 죽음 후에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1년만에 소집한 장기 의회가 왕의 전제정치를 제한하려는 일련의 개혁 입법을 추진하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1642년 8월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처음 왕당파에 유리하던 전세는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의 출현으로 의회파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왕은 스코틀랜드 군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회파 내부에서 장로파와 독립파 사이의 분열이 일어났고, 의회파의 군대 내에서도 크롬웰의 주류파와 수평파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 탈출한 왕이 군대를 일으켜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으나, 결국 의회파의 승리로 끝나고 왕은 처형되었으며 상원의 폐지, 자유 공화국 선언 등이 잇따랐다. 그러나 의회가 해산하지 않고 보통 선거법도 실시되지 않자 수평파의 불만이 폭발하였는데, 크롬웰은 이를 진압하고 의회를 해산시켜 그 자신이 호민관으로 취임, 1인 독재를 실시하게 되어 잠간 번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왕정 복고가 되고 챨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챨스 2세때 평화가 있었고 국교회의 힘이 강해 청교도 성직자들이 추출되기도 했지만 챨스2세의 죽음으로 카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라 카톨릭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신교 자유령을 선포하지만 종교적 다툼으로 네덜란드의 윌리엄의 치세 하에 종교적 자유와 분파들간의 논쟁 해결이 어느 정도 행해졌다.
리차드 박스터는 이런 혼란한 시기에 살았었다. 그의 생애는 제임스1세, 챨스1세, 올리버 크롬웰, 챨스2세, 제임스2세, 윌리엄의 치세에까지 걸쳐 있었다.
2. 생애(1615-1691)27)
리차드 박스터는 스롭셔(Shropshire)에 있는 로우톤(Rowton)에서 1615년 11월 12일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존경을 받는 분들이었지만 가난하였다. 허약한 체질을 지녔기에 육체노동이 부적합했지만 지적인 정확함과 열심은 학자적인 추구와 교양을 위하여는 적합했다. 그는 매우 불규칙한 학교 교육과 한때 루드로우에 있는 위크스테드(Wickstead)목사의 도서관에서 독서했는데 주로 경건서적들이었다. 1637년 23세의 나이로 성직을 위한 시험에 통과하고 서품을 받아 그때 워체스터(Worcester)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640년에 키더민스터에서 부목사이자 강사가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14년간 이곳에서 목회하였는데 그의 「참 목자상」(Reformed Pastor)와 그의 자서전적인 설명과 설교 안에서 심방, 요리문답, 가르침의 방법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1646년 크롬웰의 군대에서 종군 사제로 근무한 뒤 키더민스터로 되돌아가 목회했다. 1660년에 왕정복고를 환영하였고, 주교직을 거절하고 성직을 박탈 당하기도 했지만 런던에서의 결혼으로 위안을 받고 별 직책없이 집필과 설교도 자주 했다. 1685년에 그는 악명 높은 제퍼리 판사 앞에서 설교 소란죄로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감금되었고, 이때 작품을 저작하며 18개월을 보내었지만 건강상 석방되었다가 점차 쇠약해지므로 1691년 12월 8일에 죽었다.
3. 신학 사상
그는 본질적으로 온화하며 보수적이며 명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 갈등의 양편에 있는 학정과 극단들을 혐오하였고 의회(Parliament)를 동정하였다. 그는 챨스 1세의 사형에는 반대하였으며 힘의 절정에 있는 크롬웰에게 공화정은 권리 침해이며 그것의 수단은 부당한 것이며 군주정치의 오래된 형태가 백성들에게는 더 인정 받을 것이라고 말할 용기도 있었다. 군에 있는 동안 극단을 조절하는데 노력햇으며, 교회 문제에 있어서 그는 역시 중간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 교회의 허식을 거부하고 그럼에도 장로교나 독립교를 전적으로 확신하지도 않았다. 신학에 있어서도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의 중간 위치를 택하였다. 그는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분열시켰던 모든 당파들과 견해들에 대하여 관용과 이해의 여러 가지 계획을 명분화하여 그것을 촉구하였다.28)
4. 설교의 세계
1) 설교의 특징
가. 평이하고 쉬운 언어를 사용한 설교였다. 그는 구어체 설교를 강조하여 비록 그가 주로 그의 설교들을 읽어나가야 했지만 그의 설교들은 자연스럽고 대화체적인 전달 방식을 띠고 있다. 그는 가장 평이한 말들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가장 쉬운 말들이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설며하는데 가장 적절한 말들입니다. 화려한 말들은 설교를 장식하여 주며 미묘한 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 주나, 그러한 말들이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 화려하고 미묘한 어투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방해하며, ...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가능한 평이하고 뜻이 분명해야 합니다.29)
나. 그의 설교는 영혼을 사로 잡는 복음주의적인 거룩한 열정이 담겨져 있는 설교였다.
그는 영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회심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복음이 필연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만일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만 한다면 그들은 복음에 거역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30) 그리고 설교에 대한 열정이 있는데 이를 그 자신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그것을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다. “나는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였고,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설교하였다.”31) 뿐만아니라 그는 죽을때까지 배우고자 하는 열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생각을 계속 바꾸어 나갔으며 어제의 생각들에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였다.32)
다. 확신을 심어 주는 힘이 있는 설교였다.
박스터는 신체적인 약함과 부족한 미모의 약점이 있었지만 밝게 말하는 눈과 감미롭고도 설득적인 목소리와 ‘확신에 찬 어조’의 ‘친숙한 감동적인 목소리’를 통해 설교가 더욱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진지함과 성실성을 갖고 있었으며, 약한 건강으로 인해 그의 어조는 심금을 울렸다. 기운에 찬 제스처를 사용하는 열정이 있어 트레췌는 그를 “강건하고 남성적인 웅변술”을 구사하였다고 이야기했다.33)
라. 설교를 준비하고 행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설교였다. 그는 설교의 기법을 상세하게 연구하였으며, 자신의 설교 구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교를 연구하는데 있어 우리는 너무도 태만합니다. 우리는 청중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속에 들어가는 법과 각각의 진리를 철두철미하게 전달하는 법을 연구하여야만 하며, 그러한 일들을 즉흥적을 처리하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 설교를 경시하고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설교에 임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담대히 이야기하십시오!34)
마. 박스터는 대화체설교를 한 최초의 인물들중의 한사람이다.
우리, 우리가 청중들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할때처럼 친숙하게 그들에게 이야기 합시다.35)
2) 수사적 기교
그는 설교의 가장 큰 중요성을 억양과 어조에 있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좋은 주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감동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거의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청중들 개개인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할때으 경우처럼 꾸밈없이 친숙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설교속에 영혼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의 영혼에서 그들의 영혼에로의 전달이 이루어져야 합니다.36)
3) 청중 이해
그는 청중들을 사랑했으며 특히 그는 설교와 방문 그리고 협의하는 일 이외에도 사역과 복음 전파를 위한 많은 방법들을 개발했는데,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 평신도을 폭넓게 이용하였다. 평신도들은 그들 주변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과 기독교 신앙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가 가장 왕성하게 목회한 키더민스터 전역에 기도회 모임을 구성하여 복음 전파에 이용하였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때는 한 거리에 한집 정도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떠날 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가정이 하나도 없는 거리들이 몇몇 있었다37)라고 박스터는 이야기 했었다.
청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신앙에 도전할 수 있도록 쉽고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했으며 그 결과 훌륭한 화술을 갖게 되었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설교집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4) 설교문 분석을 통한 설교이해
a. 설교 서론 부분에서 설교의 요지를 미리 언급한다. 〈그리스도와 구원을 경시함. 중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 중에 하나가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고자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가 인간이 파멸하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여러분은 이 문제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반드시 크나큰 관심을 쏟아야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첫째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노력할 것이며, 둘째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드릴 것이며, 셋째 여러분이 이 죄의 파괴적 권능에서 기꺼이 빠져 나오도록 도와 줄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38)
b. 위의 설교문에서도 보여주듯 문장이 지루하고 장황하고 세밀하다. 설교의 논지를 분명하게 하고 강하게 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지루하고 때로는 어디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화가 치밀 때가 있다.
c. 질문을 많이 던지므로 청중들이 설교속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당신이 가볍게 여기는 것이 누구의 구원입니까? 당신 자신의 구원이 아닙니까? 당신이 당신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이 귀중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왜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 아니면 저주를 받을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까? 자기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까? 스스로 자신의 적이 되었기 때문입니까? 자신의 음식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가볍게 여긴다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은 당신이 경시하였던 것이 당신 자신의 구원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39)
d. 〈회개에 대한 설교, 본문 겔36: 31〉중에 그의 설교 준비는 본문비평까지 하며 이본들을 비교
분석하고 설명하는 깊고도 철저한 준비를 엿 볼 수 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묘사한 글입니다. ...본문의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라는 본문에 대하여 70인역 성경은 “스스로를 불쾌하게 여기리라”라는 말로 번역하였으며, 갈대아 역본에서는 “ 흐느껴 울리라”라는 말로, 시리아어 역본은 “얼굴을 찌푸리리라”라는 말로, 70인역 성경은 20장 43절에서 “스스로 얼굴을 때리리라”라는 말로, 그리고 아랍어 역본은 그 의미를 왜곡시켜 “ 그 모든 것들을 너희가 하여서는 안될 것으로 여기리라”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40)
e. 반복된 말로 설교를 각인시킨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자기 혐오가 참된 회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고의로, 우매하게 또 고집럽게 스스로를 파멸시켜 온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를 미워하며 갈기갈기 찢어 고통을 주면서 자신에게 복수를 행하는 그러한 자포자기의 저주받은 사람이 갖고 잇는 자기혐오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자가 갖고 있는 자기 혐오는 다음과 같은 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
(1) 참된 회개에서 나온 자기 혐오는,.....(2) 참된 회개에서 나오는 자기 혐오는....(3)참된 회개에서 나온 자기 혐오는.... (4)참된 회개에서 나오는 자기 혐오는... (5) 참된 회개의 자기 혐오는.... (6)참된 회개에서 생겨난 자기 혐오는.... (7) 참된 회개에서 비롯된 자기 혐오는....41)
f. 설교중에 예언자적인 간구와 재앙 선언이 있다.
오 주님이시여. 이 죄된 나라에 커다란 긍휼을 베푸시어 우리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독교 원리들이 우리의 진실된 마음에 의하여 실천도리 수 있도록 하옵소서! 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을 하여야 하는가. 지옥을 피하고 하늘을 우선 구하여야 하는가, 성서가 우리의 신앙의 지침서이자 시금석이 되어야 하는가......42)
그리스도의 이득과 거룩함에 반대하는 통치자들에게 화 있을찐저!(시편 2편을 읽어 보십시오) 스스로 양심을 함정에 빠뜨리는 통치자에게 화 있을찐저! 통치자들을 주님보다 낮은 위치에 놓고 그들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불복종하는 사람들로 박해하고자 하는 통치자들에게 화 있을찐저!.......43)
5. 역사적 평가
그는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목회에 대한 그의 개념, 개인적인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통찰력, 평신도 사용, 종교적 자유에 대한 그의 개념들을 등에서 박스터는 그 시대의 어느 누구와도 달랐다. 그는 왕과 호민관 앞에서도 용기있게 행동했고 전투에서도 용맹을 보여 주었으며, 교인들 앞에서는 사랑과 자비를 행하였고 그의 글들에서는 눈부신 재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영어로 쓰여진 신앙적 저술들 중에서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글들 가운데 몇몇을 쓰기도 하였으나, 그의 삶은 격렬한 논쟁에 휘말려 있던 삶이었다. 한마디로 해서 박스터의 생애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감동적인 증거였다.44)
Ⅲ. 결 론
오늘날 설교자에 주는 교훈
지금까지 경건주의자인 스페너와 청교도인 박스터의 설교 세계를 고찰해 보았다. 이들은 형식주의에 빠진 17세기 강단에 내용의 진지함과 설교자의 깊은 경건의 인격을 통해 설교의 부흥을 일으키기 위 해 그들 나름대로 처한 상황 속에서 열심과 지지함을 보인 설교자들이었다.
첫째로, 오늘날의 가치관의 혼란, 종교성의 약화, 생활의 강팍 속에서 스페너의 설교 세계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교회를 향하여 도전을 주고 있다. 이 도전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 즉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동경하는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그 근원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환원하고 예수의 삶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제자도의 실현을 위한 지침인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도 '신자다운 신자',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은 일체의 죄, 불경건, 불신앙, 열매없는 무화과와 같은 신앙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적 기대에 타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의 가치를 두는 신앙으로서 변화를 일으켜야 할 책임이 설교자들에게 다시금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둘째로, 현대 교회의 설교자들에게서 언어와 행동과 마음 가짐, 인격 등에 교인들이 지나칠 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때 설교자의 인격의 신실성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박스터의 Reformed Pastor에 나오는 다음의 말은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45)
여러분의 기도와 찬양과 교리가 양떼들에게 훌륭하고 달콤하게 나타나면 양떼들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나의 심령이 싸늘해지면 나의 설교도 싸늘해지고 나의 심령이 혼돈되면 설교도 혼돈됩니다. ... 내 설교가 냉랭할 때 내 양떼들이 냉랭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 오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욕과 정열과 세상적인 경향으로부터 떠나십시오. ...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양떼들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 무엇보다도 남이 알지못하는 기도와 묵상을 많이 하십시오.
인격적인 경건 생활뿐 아니라 진지한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깊은 말씀의 선포로 시간에 쫓기는 현대으 청중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고, 청중들이 말씀과 진지한 만남이 이루어 지도록 청중들의 삶의 형편을 살펴 헤아리는 뜨거운 목자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참고도서
정장복,『설교학 서설』, 서울 : 엠마오, 1992.
이형기, 『세계교회사Ⅱ』, 서울 :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6.
Dargan, Edwin Charles, A History of Preaching, Vol. 3,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 서울: 솔로몬, 1995.
Brillioth, Yngve, A Brief History of Preaching, 홍정수 역, 『설교사』서울: 신망애, 1987.
Fant, Clyde E., & William M. Pinson, Jr.,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An Encyclopedia of
Preaching, Vol. II (LUTHER to Massillon 1483-1742) (Waco, Texas: Word Books, 1971), 신문구 역,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서울 : 성서연구사, 1986.
Spener, Philip Jacob, Pia Desideria, 모수환 역, 『경건한 열망』, 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Brown, Dale , Understanding Pietism, 오창윤 역, 『경건주의 이해』,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7.
1) Edwin Charles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 3,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37쪽.
2) 이형기, 『세계교회사Ⅱ』, (서울 : 한국장로교 출판사), 292쪽
3)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64쪽.
4) 위의 책, 66쪽
5) 위의 책, 67쪽
6) 위의 책, 67쪽
7) 이형기, 『세계교회사Ⅱ』, (서울 : 한국장로교 출판사), 292-293쪽
8)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68쪽.
9) 위의 책, 93쪽
10) Philip Jacob Spener, Pia Desideria, 모수환 역, 『경건한 열망』(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29쪽.
11) Dale Brown, Understanding Pietism, 오창윤 역, 『경건주의 이해』,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7), 30쪽.
12)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94쪽.
13) 위의 책, 94쪽
14) 위의 책, 95쪽
15) 위의 책, 96쪽.
16) Spener, 모수환 역, 『경건한 열망』(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27쪽.
17) 위의 책, 128쪽
18) 위의 책, 129쪽
19) 위의 책, 100쪽
20) 위의 책, 103쪽
21)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95쪽.
22) Spener, 모수환 역, 『경건한 열망』(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02쪽.
23)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95쪽.
24) Yngve Brillioth, A Brief History of Preaching, 홍정수 역, 『설교사』(서울: 신망애, 1987), 200쪽.
25) 위의 책, 201쪽
26) 이형기, 『세계교회사Ⅱ』, (서울 : 한국장로교 출판사), 228, 292쪽
27)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171-173쪽.
28) 위의 책, 172쪽
29) Clyde E. Fant, Jr & William M. Pinson, Jr.,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An Encyclopedia of
Preaching, Vol. II (LUTHER to Massillon 1483-1742) (Waco, Texas: Word Books, 1971), 신문구 역,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서울: 성서연구사, 1986), 377쪽
30) 위의 책, 378쪽
31) Dargan,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솔로몬, 1995), 173.
32)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380쪽.
33) 위의 책, 378쪽.
34) 위의 책, 379쪽
35) 위의 책, 380쪽
36) 위의 책, 379쪽
37) 위의 책, 375쪽
38) 위의 책, 385쪽
39) 위의 책, 395쪽
40) 위의 책, 403쪽.
41) 위의 책, 404-405쪽.
42) 위의 책, 436쪽.
43) 위의 책, 440쪽.
44) 위의 책 376쪽.
45) 정장복,『설교학 서설』, (서울 : 엠마오, 1992),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