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21-33
현대사회는 가정문제가 점점 더 갈등이 깊어가고 사회문제가 곧 가정문제로 직결되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가정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되지만 귀족이나 재벌, 심지어 대통령 가정에게까지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가장 중요한 두 기관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즉 가정을 가지고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지체관계로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이 본문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남편과 아내 관계로, 머리와 몸의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교회와 가정을 묶어서 전하고 있는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신앙생활의 원리요 가정건설의 원리요 교회건설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의 복식게임
첫번째 원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입니다.
본문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한번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반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사랑이 어렵습니까?
복종이 어렵습니까? 이 두 가지는 둘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면 이 두 가지는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첫번째 원리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아내가 남편을 복종하는 것으로 규정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우선적인 질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열이 먼저냐 순서가 먼저냐 그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복종의 원리에서 주님은 이렇게 전제를 합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두 가지 조건을 앞세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과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의 원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피차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식게임이다,
가정생활은 복식게임이다,
교회생활은 복식게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새겨둘 만합니다. 우리는 복식게임을 하는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행복하고 하나님의 축복 안에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단식게임을 하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홀로 잘난 척 하고 홀로 최고인줄 알고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지도 않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지도 않는 오직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단식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 복종의 복식게임 안에서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생활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상담가의 사례입니다.
한번은 자기 집 아이가 상담가인 엄마에게 와서 "어머니, 내 친구가 큰일났어요. 공부도 잘하는 아이인데 요즘 며칠동안 공부도 안하고 울기만 하고 나한테 가출을 하겠다고 해요. 어머니, 좀 도와주세요." 그래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한번도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표를 가지고 가도 칭찬할 줄 모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였습니다. 한번은 공휴일이 되어 온 가족이 놀러 가기로 했는데 이 아이는 고3생인데다가 도저히 같이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혼자 집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비디오테잎을 빌려다가 비디오를 틀었는데 테잎이 감겨서 작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고치려다 텔레비전도 안 나오게 됐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와 오늘 뭐했냐고 물으시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비디오를 보다가 고장이 났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때 그 아버지가 그만 폭군으로 변하여 그 아이 보는 앞에서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다 부숴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는 비디오와 텔레비전이 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망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나는 이제 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아버지 앞에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이를 보고 이 상담가가 이렇게 상담을 했습니다. "얘야, 너 가출을 하기로 생각한 것은 정당한 거야.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가출을 하겠다. 그런 경우에는 가출을 할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너 같은 환경에서 가출할 생각이 없다면 그 얘가 바보지 네가 정상이야" 하고 이 아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 가준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 이 아이의 아픈 상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 부모에게도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하고 자란 아이이기 때문에 친구 어머니 앞에 완전히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정신적인 개방이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들이 그날 밤에 전부 다 토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가출하는 것 좋아, 그런데 내가 좋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단다. 내 방법대로 가출하면 정말 잘 될 거야. 너 내 말에 순종하겠니?" "예, 하겠습니다."
"너 지금 고3이 아니냐? 이제 몇 달 있으면 시험을 쳐야 하는데 지금까지 공부를 잘해 왔던 대로 몇 달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합격을 해라. 그러면 깨끗하게 가출이 된다. 그렇게 해서 가출을 해 보자. 나도 도와줄게" 아이가 이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여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여 대학에 입학해서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나 교회생활에서 상대방의 어려움과 고통 혹은 내게 대해서 잘못한 것과 섭섭하게 했던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혼자 단식게임을 해 버리고 끝내버립니다. 아무리 죽을 짓을 했어도 그 고통은 복식게임을 해 주라는 것입니다.
위로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은 그런 묘미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복종은 굴종입니다. 사랑이 있는 복종이라야 보람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또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복종은 아름다운 복식의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해야 됩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적을 행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까?" 그때마다 그 어머니의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내 아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아들로 키운 것뿐입니다." 노아는 지금 쓸 배가 아닌 120년 후에 쓸 배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바다도 아니고 산에서 지으라는 말씀을 복종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적 9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가라고 하십니다. 사랑과 복종은 '영적 911'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영적 9119라는 것입니다.
911차가 지나가면 다 비켜주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미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산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119는 가서 긴급상황을 수습해야 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지고 분석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고받는 사람이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소?" 라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지는 일은 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출동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을 먼저 계산해보고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사랑해 봅시다.
계산은 다음에 합시다. 복종도 이해하고 복종하려 하지 말고 복종해 놓고 한번 계산 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에게 사랑은 너무 조건이 많아지고 복종은 너무 이권적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대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 하나의 위기입니다.
가정의 부부사랑, 부부관계, 식구들끼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가 살아나야만 하나님이 의도한 가정이 건설되고 주님이 의도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한 가지 우리가 용어를 조심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낍니다. 흔히 우리가 '결손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요즘 보도에도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문제가 많다고 보도를 하는데 그런 보도도 해석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진정한 결손은 사랑의 결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모님이 있으면서도 사랑이 병든 가정이 결손가정입니다.
복종이 결여된 가정이 결손가정입니다. 흔히 결손가정은 문자적으로 부부 중에 한 쪽이 없거나 양쪽이 없으면 결손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보면 아버지 혹은 어머니만 있는 가정이라도 건강한 가정이 많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아이들이 바로 자라는 가정들이 다수입니다.
양쪽 부모가 없는 가정이라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결손가정 아이들이 문제가 많다고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계시면서도 아버지답지 못해서 없는 것만 못한 가정이 있고 어머니답지 못해서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가정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결손가정은 사랑의 결손, 복종의 결손입니다. 문제 있는 가정에는 사랑이 계산되고 복종이 이권다툼이 되는 그 가정이 문제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사랑, 우리들의 교우사랑은 영적 911의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과 교회를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떠나고 만나는 복식게임
두번째 원리는 떠나고 만나는 원리입니다.
32절에 보면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남자를 말합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정의 원리이며 교회의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떠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건설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는 관계가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떠난다는 말은 인격적인 성숙을 말합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독립적인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영적인 의미는 새로운 관계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있을 때의 아들이 아니고 가정을 이룬 아들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관계를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부모관계가 아니고 이제는 아내와 합한 가정으로서 부모관계를 재정립하라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은 매우 소중한 관계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만 만남도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지저분하면 시작이 지저분합니다. 분명하게 떠나야 출발이 깨끗해집니다.
저도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결혼식 중에 딱 한번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나타난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가끔 있는 일인데 실재로 보니까 남의 일이지만 정말 황당했습니다. 깨끗하게 떠나고 깨끗하게 만나는 인간관계가 안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은 가정과 교회 건설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들 가정에는 떠나 보내야 될 것들이 자리를 잡으면 안 됩니다. 남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고, 아내의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다면 그 가정은 불행한 것입니다. 깨끗이 떠날 것들은 깨끗이 떠나야 됩니다. 그리고 합해져야 됩니다.
우리들의 생활양식 속에도 떠나 보낼 것을 분명하게 떠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새로운 일과 새로운 축복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술, 담배, 노름, 심지어 사기치는 버릇, 악덕 채무버릇 등 온갖 버릇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믿으러 옵니다.
예수 믿으러 오는 사람들은 온갖 버릇들이 없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 내가 예수 믿고 술을 끊겠다, 담배를 끊겠다 자신하고 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염려를 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보면 하나씩 서서히 다 떠나 보내게 됩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고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청산해야 될 것들이 하나 둘씩 청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숙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은혜의 자리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믿습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 비밀이 크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떠나고 깨끗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살면 그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은 깨닫고 나면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을 깨닫는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닮아 가는 하나되는 원리
세번째 원리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하나되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우리는 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 이것이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해석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 본질의 의미만 가지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의 의미는 자기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희생하여 세상을 사랑한 것이 사랑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희생이 있는 거기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자기희생이 없는 거짓사랑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있는 사랑, 그리고 자기자신을 낮추는 복종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하나됨의 원리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교회는 온갖 쓰레기를 모아 둔 쓰레기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난 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그 후유증으로 많은 성도들 앞에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등지고 예수님과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품에 안겨야 되는데 그만 이 사람은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산촌 변두리에 묻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야인처럼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산나물을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장작을 가지고 불을 지피는데 산나물은 적당하게 데쳐야 되니까 장작을 몇 개 꺼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작개비는 저절로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일을 한참 하다가 불이 꺼진 장작개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궁이의 장작개비가 활활 불이 탔지만 바깥에 끄집어내어 놓으니까 그대로 꺼져버린 이 장작개비가 내 모습이구나, 교회를 등진 내 모습이 타다가 꺼져버린 장작개비와 같은 모습이구나' 그 장작개비를 보고 교회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소중합니다. 가정도 소중합니다. 주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복종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인테리어 하고 떠남과 만남의 원리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아웃테리어 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한번 새겨두고 싶은 말씀을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좋은 영향을 물려주는 부모로 살고 가야 됩니다. 젊은 세대들이 저지르는 그 악의 대부분은 어른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부모가 되어 또 다른 악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결손가정의 약점을 교회가 보완해 주어야 되고, 사랑이 병든 가정, 복종이 결여된 가정이 교회를 통하여 채워지고 은혜를 받고 그런 가정들이 묶어져서 하나님의 교회가 또한 사랑과 복종의 공동체가 되어가야 할 줄을 믿습니다.
어느 유명한 인사의 간증을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칠십 평생을 살면서 부모님께 너무나 귀한 유산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집에 돌아와 보면 어머니가 자주 집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가셨습니까?" "교회에 갔는가 보더라" "왜요?" "뭐 먹을 게 생겼는지 챙겨서 목사에게 가지고 가더라" 그러면서 이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꼭 토를 달아주는 것이 "얘, 네 어미가 목사에게 하는 거 나한테 반만 하면 열녀문을 세워줄 거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에게 어머니를 한번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그 부모 밑에 살면서 교회가 첫째고 목사님이 첫째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 사람도 칠십 평생동안 그 부모님이 물려준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놀라운 축복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혼자는 무슨 소리든 하십시오.
부부는 안방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괜찮습니다.
동경대학 총장을 지내신 그 어른은 사랑과 행복의 미학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부관계는 천사의 말과 악마의 말을 동시에 듣는다'는 것입니다. 악마가 부르짖는 소리를 부부끼리는 하십시오.
그러나 자식들이 듣는 앞에서 해서는 안됩니다.
못난 부모들은 서로를 비방합니다.
이놈아, 네 애비처럼 살지 말아라, 이놈아 네 애미처럼 살지 말아라, 그런 소리를 자식들 듣는 자리에서 일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현장교육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따라서 꼭 그렇게 하게 됩니다.
저는 이 명사의 간증 속에 큰 교훈이 있다고 봅니다. 자기들이 듣는데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고 목사를 사랑하는 그 부모의 믿음대로 하니까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영국의 정치가 처칠이 왜 위대한 줄 아십니까? 효자 중에 효자입니다.
처칠 수상이 전성기에 있을 때 신문사에서 몰래 취재를 했습니다. 처칠의 유치원 선생님부터 대학 스승까지 처칠과 관계된 스승들을 전부 기획취재를 해서 이런 처칠을 키워낸 스승들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때 이 처칠이 그 기사를 보고는 신문사에 당장 편지를 썼습니다.
"귀 신문사의 보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내 어머니가 빠졌습니다."
처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더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향하여 깊은 효행으로 우리 앞에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적인 영향이너무 위대하니까 그의 효심은 감춰져 있지만 그분의 글 속에는 놀라운 효도의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가르쳐 주시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 떠남과 만남의 원리,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이 세 가지 원리 안에서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세워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