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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아벨(2)

4. 메시지


첫째, 비록 가인이 살인을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여주신다. 비록 가인이 형제를 죽이는 실수를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특별한 표징을 주어 그가 아무로부터도 해함을 받지 못하게 하신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의 결과로 징벌을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보호의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신 24:4 에서 다른 남자에게 들어간 여자는 다시 데려 올 수 없다고 모세의 법을 통하여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와 예레미야를 통하여 다시 데려오시는 그래서 다시 사랑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 즉 자기의 말을 돌이키시면서까지도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신 7:7,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너희를...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에서 잘 나타나며 요 3:16에 와서 자신의 독생자까지 내어주는 극치의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둘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참으로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된다는 것이다(마12:49-50).


성경의 주된 사상 중의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창 12:1-3) 것처럼 네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는 부모와 형제를 무조건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됨을 말한다.


성경에서 보면 거의 모든 인물들의 자연적인 탄생이 어떠했느냐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고 반드시 소명을 받는 장면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데서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아브라함의 소명과 결단, 모세의 소명과 야웨의 이름 계시, 예레미야의 소명, 이사야의 소명, 예수의 소명,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소명장면 등이다. 이는 육적인 것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이상하게도 구약성서는 책 전체를 통해서 형제 사이의 불화와 살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육신의 형제일지라도 또 같은 피를 타고난 동족일지라도 육의 것만을 생각할 때는 서로 불화하거나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멀리 뵈는 믿음의 도성을 바라보지 않고 또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때 육신의 형제들 사이에 형제 살해와 같은 불화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가인과 아벨 뿐만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고 그 형제, 입다와 그 형제, 특히 모세는 자기 민족을 도우려고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한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 정은 간 곳이 없고 그를 배신하는 것은 그의 동족이다.


그 자신의 동족의 배신에 의해서 그는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다. 예수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족인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는 아무리 형제며 자매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서로 간에 인간적인 유익의 문제가 걸려 있을 때 배신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는 회개했을 때 나타나는 새 생명에 대해서 말한다. 육(육(肉)) 안에서 죽고 주(主) 안에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구약성서에서는 살인자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이다.

모세는 육신의 정을 못이겨 살인까지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인 것임을 깨달았을 때 이제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게 된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유대교의 열성분자로서 소위 민족종교라는 이름으로 스데반을 돌로쳐 죽이게 된다. 그러나 회개하였을 때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전하는 큰 사역을 담당하게 된다.


인간 가인은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후 새로운 문명의 건설자로 부상하게 된다.

계속되는 17-24절에 보면 가인의 후예는 인류 문명에 기초가 되는 여러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성을 쌓는 사람이 되고, 또 야발은 아벨이 못다한 육축하는 자의 조상이 되며 유발은 음악하는 자의 조상이 된다. 또 두발가인은 현대문명의 초석이 되는 동과 철을 다루는 사람의 조상이 된다.



Ⅱ.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조성기 목사, 현대교회)



1. 들어가는 말

- 상실의 세대, 곤고한 인간 群像 -


목회자로서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지난 20여년의 순례길 여정을 돌이켜 볼 때 교인(사람)들의 모습들이 참으로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생활 수준뿐만 아니라 취미와 정서 그리고 신앙의 모습도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미래 사회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예견하듯이 최고의 물질 문명 시대를 맞게 되면서 인간 위주의 편리와 온갖 서비스를 제공받아 더 편리한 생활을 할 것이라는데 별 이의가 없다.


그러면서도 짐짓 떨쳐버릴 수 없는 고민과 갈등은 그런 최첨단의 물질 문명을 꿈꾸며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로워하고 불안해하고 지쳐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쌓은 사람이라도 조금만 터놓으면 그들의 고민과 불안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또한 지성과 품위를 갖춘 사람일지라도 나름대로의 걱정과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화려한 구호와 상품과 꿈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외롭고 피곤하고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

특히 지난 몇 년 사이 IMF로 인해 발생한 일명 상실세대의 출현으로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어 모두들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혼자 해본다 : 정말 사람들은 이런 고도의 물질 문명속에서 행복해 하고 보람을 느끼며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일까? 최첨단의 기계와 정보로 인해 인간은 얼마나 더 만족할까? 그 대답이 긍정적이지 않다면 배고프고 원시적으로 보였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해 줄까? 쉽게 답할 수 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왜 이토록 곤고한 삶이 깊은가?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이야기를 함께 연결해 보려고 한다. 또한 그를 오늘의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 그의 경우와 출발은 약간 다르지만 - 고단한 생활과 불안한 미래 때문에 울부짖는 소위 "현대판 가인(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II. 성경의 가인 이야기

- 가인의 추방과 방황 -


본몬 창세기 4장 1-16절은 가인을 중심 인물로 그리고 있다. 비록 히브리서 기자는아벨이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이해하고 있지만(11:4) 본문에서 아벨은 지극히 소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벨은 친형인 가인에 의해 무고한 죽임을 당한 피해자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 아벨의 말은 한 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단지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피가 하나님께 울부짖는다고만 되어 있다). 또한 아벨이 소개될 때 아벨이 누구인지 이미 독자에게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아우 아벨'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아벨은 저자의 관심 밖이다(vv. 2, 8, 9, 10, 11에서 7회). 이야기 전체는 철저히 하나님과 가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저자의 관심도 가인에게 집중된다.


가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가인과 아벨은 친형제로써 서로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다 : 가인은 농부, 아벨은 목자. 이들은 각각 자신의 수고로 거둔 것 중에서,

추수한 곡식과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을 헌물로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제사 결과는 각각 달랐다 :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으나 가인의 제물은 반대로 거절되었다.


본문은 그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다만 추측할 뿐인데 성경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고 한다 :

1) 하나님은 목자를 선호하신다 ;

2) 하나님은 희생 제사를 더 좋아하신다 ;

3)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의 뜻이다 ;

4) 아벨은 가인과 달리 믿음으로 드렸다 ;

5) 가인은 자신의 것 가운데 일부를 드렸지만 아벨은 최고를 드렸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만으로는 위의 어느 것도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단지 6-7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꾸중한 내용을 볼 때 가인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 같다 :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죄가...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가인은 하나님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그의 잘못 때문에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죄를 잘 다스리라는 경고까지 받는데, 바로 그 죄는 형제 살인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이 정성스럽게 가꾸고 거둔 자신의 농산물이 하나님께 거부되고 "죄를 다스리라"는 질책까지 받게 되자 자제력을 잃고 만다. 급기야 가인은 '홧김에' 자신의 친혈육인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이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징계를 형제에게 전가시키고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화를 풀고 있다.


하나님께서 손수 흙으로 빚어 만들고 생기를 부어 넣었던 아담과 이브의 생명의 신비와 순수함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텐데, 안타깝게도 첫 열매와 같은 가인은 고작 피의 소리를 하늘에 전할 수밖에 없는 형제 살인의 비극적 사건으로 발전되게 된다.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을 직접 찾아오셔서 그와 대화를 시작하신다(표준 새번역 사용) :


하나님 :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 :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제 너는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 다니게 될 것이다.

가인 :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추궁 끝에 자신의 살인을 시인하게 되고,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한 심판의 결과를 듣는다 :


1) 가인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다. 아담과 이브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을 때는 힘들게 수고할 경우 그나마 땅의 소출을 먹을 수 있었는데, 가인의 경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땅의 소산물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땅이 가인의 죄악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


2)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전하면서 유랑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땅에서도 쉬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


3) 살인자의 수치심을 평생 안고 살면서 도망자로서 피해 다녀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인의 간곡한 부탁과 하나님의 특별 배려로 죽음만은 면하는 표를 얻게 되어 생명은 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달픈 삶의 시작일 뿐이었다.


가인은 형제(생명)의 소중함을 보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분노와 욕심 때문에 무고한 형제를 죽이게 된 것이다. 살인의 분명한 이유를 아벨에서 찾기 어려워 보인다.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즉 질투와 경쟁심이 살인의 동기이다.


가인은 경쟁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화를 풀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했을지 모르나, 그는 이것으로 상당한 죄값을 치르게 된다. 비록 생명만은 보존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으나, 이제 그는 평생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자신의 순간적인 실수를 후회하면서 농사꾼이 땅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의식 생활마저 걱정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는 가족과 친족으로부터의 축출이요 전혀 미지의 땅에서 도망자로서 살아야 하는 불안한 미래를 의미하는 저주였다. 하나님도 뵐 수가 없는 모든 관계로부터의 단절이다. 자신이 품은 분노와 그로 인해 저지른 살인의 대가는 실로 너무 큰 것이었다.


III.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

- 현대의 가인(들)과 치유 -


창세기 본문은 우리에게 자신의 죄(살인) 때문에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방랑하면서 사는 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과 함께 범죄한 인생일지라도 보호하시고 그 은혜를 드리워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준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오늘 이 순간에도 자신의 분노와 욕심을 이기지 못해 인생을 방황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창세기의 가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인을 직접 찾아 오셔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셨고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다.

뿐만 아니라 가인이 가까운 남자 친척에 의해 복수될(민 35:9-28) 것에 대비하여 그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표를 찍어 주셨다.

또한 그는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만이 가능케 한 일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그 사랑은 변함없이 오늘도 허물진 인생을 향한 긍휼의 손길로 온 땅에 드리워져 있지 않는가? 그래서 세상은 소망이 있지 않을까?


한편,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종류의 가인(들)이 특히 이 현대 사회에 무수히 살고 있다. 성서의 가인과는 다른 경우이다.


자신의 의식적인 잘못과 실수보다는 거대한 현대의 물질 문명 사회에서 살아남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며 방황하는 상실 세대의 사람들이다. 화려한 미래의 보장과 약속을 위해 수많은 정보와 자격증과 경쟁력을 갖추면서 살아가지만, 자신은 언제나 그 경쟁 대열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고민들이 현대인들을 짓누르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가인처럼 형제에 대한 시기와 질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소외감의 분노와 이어서 물리적인 살인으로 치달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자신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날마다 자신감을 잃어가며 좌절하고 있다.


이는 세계의 유명한 대도시(뉴욕, 파리, 프랑크 푸르트, 런던, 서울. . .)마다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 혹은 노숙자 및 거지들이 대거 몰려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사실이다.


이들은 어떤 이유든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때로는 남보다 능력이 떨어져서, 때로는 지나친 긴장과 경쟁을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해서 방황하고 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때로는 너무도 외롭거나 삶의 의미를 잃어서 그렇게 자신을 자학하면서 현대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자신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이들을 향해 퇴폐적인 인간으로, 혹은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아니면 게으른 인간으로 낙인찍고 불필요하고 무익하거나 유해한 인간으로 매도해 버린다. 이렇게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사는 사람들이 곳곳에 많이 있다.


불행히도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들은 물질과 기계 문명의 첨단화와 화려한 인류 사회를 꿈꿀 뿐 그런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다. 단지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몫으로만 남겨져 있다.


현대 사회가 빚어낸 가인(Cains)들의 슬픈 군상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소외되고 버려지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우리의 화려한 무대가 크면 클수록 검은 그림자도 그만큼 짙게 드리울 것이다.


IV. 나가는 말

- 방황하는 가인(들)을 찾아가는 사랑 -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사회가 잃어버리고 또한 잊고 있는 현대의 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위로를 증거 하는 복음적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음이 피폐하고 찢겨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애통하면서 살고 있다.


이유는 다르지만 가인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말씀이 정작 이들에게 진정한 복음으로 들려지도록 예수의 삶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그러했듯이 이 사회에서 - 자발적이든 아니든 - 소외되고 버림받고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는 많은 가인들을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 이는 예수께서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눅 15:4)는 물음처럼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병자들과 세리와 창녀들을 찾아 나섰던 것과 같은 마음이다.


이 땅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울부짖는 가인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품어 안아야 한다. 이 일에 진지하고 치열하게 응답하지 못 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는 경고의 질책과 심판을 면할 수 없으리라.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책임 있게 사는 존재"로서의 참 모습을 어느 때보다도 진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미래 사회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지상 명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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