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아벨(1)

1. 본문의 상황과 내용(창 4:1-16)


1. 서론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대언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선택한 대언자들에 의해서 대언된 말씀이다. 이 말씀 안에는 때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들어와 있는가 하면 대언자 즉 예언자들에 의해서 대언된 말씀이 들어있기도 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나타난다. 먼저는 이 세상dmf 향해 섭리된 또는 대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인 삶을 향해 선포된 말씀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위한 지혜보다는 지켜야할 강령 혹은 윤리적 측면이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J, P, E 문서라는 명칭으로 학계에서는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신명기(D)에서 보면 이 세 가지는 모두 합하여 모세의 설교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본문 창 4:1-16은 대표적인 야사(J)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단화이다. 두 형제가 어떻게 서로 불화 하게 되고 결국 남아 있는 형인 가인은 떠돌이며 방황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이고 있다. 성서는 이렇게 간략한 야사와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어떻게 인간들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는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야사와 같은 이야기는 때로는 비윤리적이며 편법인 듯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적합한 것 같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 38장에 나오는 시아버지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다윗의 조상인 베레스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는 롯과 두 딸의 이야기다. 어쩌면 불경스러워 보이는 이야기가 왜 거룩한 성경 안에 들어와 있는지 이해가 잘 안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행간을 잘 살펴보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 지를 보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이와 같은 대표岵?이야기다. 성경은 때로는 단어로, 때로는 격언으로 때로는 싯귀로, 때로는 자그마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대언한다. 이렇게 인간들이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는 사고구조 깊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언어체계를 통해서 이야기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H. Gunkel과 같은 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민담(folk tale) 혹은 야사라고 불렀다. 자기 자손들이 듣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부모들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식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생명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과 신앙의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본래 하나 하나가 원래는 독립된 이야기였다. 이러한 독립된 이야기가 서로 연결 될 때에 성서의 기자는 족보와 같은 리스트를 가지고 연결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평생에 나타나는 이야기도 다 기록하기 힘든데 수많은 조상들을 다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인물을 선택하고 그 인물이 만들어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선택된 특정한 사건들을 연결해서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라고 할 것이나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인간의 죄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생명이 어떻게 계속되었는지를 보인다고 할 것이다.


2. 원역사 속에서의 가인-아벨 이야기의 문맥적 위치


문맥 구조적으로 이 단화는 천지창조(창 1:1-2:4a), 에덴 동산(창 2:4b-24) 인간의 타락(창 창 2:25-3:24), 가인과 아벨(창 4:1-16), 가인의 가족(4:17-26)의 순서로 나란히 나타나며, 창 5장에서 아담의 후손인 홍수 이전의 족장들에 대해서 전부 요약한다. 창 4:17-24는 가인의 후손이 한 일, 4:25-26은 아담의 셋째 아들 셋에 대해서 말한다. 원역사의 전반부(창 1-5장)에서 아담과 그 세 아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면, 노아와 그 세아들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원역사의 후반부(창 6-11장)는 홍수 이야기(창 6-9장)와 노아의 족보(10장)와 바벨탑 이야기(11장)가 나온다. 이를 재구성해 보면 1:1-2:4a까지 삼라만상의 창조; 2:4b-24까지 인간과 그가 거주할 에덴동산의 창조, 창 2:25-3:24까지 에덴동산에서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실존적 타락과 실락원; 창 4:1-16까지는 에덴동산 밖에서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사회적 타락; 창 4:17-24 가인의 가족; 4:25-26 셋을 낳음, 창 5장은 아담가족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아담의 족보를 열거한다. 이러한 질서 정연한 구조는 문서설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문서들의 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통전적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역사 (창 1-11장)의 거시적 문맥구조는 다음과 같다.

창 1:1-2:4a, 천지창조

창 2:4b-5:32, 아담과 그 세 아들 및 후손의 족보

창 6:1-11:32, 노아와 그 세 아들 및 후손의 족보


이러한 문맥가운데 위치한 창 4:1-16에 나타난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구조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5, 해설, 가인과 아벨에 대한 배경 해설

6-7, 대화, 가인에게 한 야웨의 질문

8, 해설.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해설

9-14, 대화, 야웨와 가인의 대화

15-16, 해설, 가인의 운명에 대한 해설


3. 본문 주석


1절. 남자(아담, adam)가 그의 아내('ishshah) 하와(chawwah)를 알았더니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야웨로 말미암아 내가 남자('ish)를 얻었다 하니라. 1절에서 아담과 하와, 성인 남자(남편)와 성인 여자(아내)가 대칭적 균형을 이루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득남이라는 말은 'ish인데 남편이라는 뜻이 강한 의미의 말이다. 왜 아들(ben)이라고 하지 않고 성인 남자 혹은 남편이라는 의미의 'ish라는 단어를 썼는지에 대해서 서양학자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모두 설득력이 약하다. 이 말은 동양적인 사고구조에서 이해된다고 할 것이다. 아시아권 세계에서 첫 장남은 장차 집안을 이끌어가고 대를 이어나가야 할, 또 한 여자가 노후에 의지해야 할 미래의 남편 역할을 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성서는 갓난 사내 아이로부터 미래 인간의 조상이 될 신앙적인 인물을 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일단 득남한 후 이제 미래의 집안을 이어갈 새로운 기둥을 "얻었다"(가인의 이름과 동족어인 qanah)는 의미로 성서의 저자는 이 말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6-24절까지 집안 가문이 가인을 통해서 어떻게 전수되어 나갔는지를 말하고 있는데서 드러나며 단명할 아벨에 대해서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가인의 형제라고만 부르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아담은 고유명사일 수도 있고 보통명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관사가 아담 앞에 있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남자가 여자를 알았더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와는 여성생명 즉, 생명의 모체를 말한다(창 3:20). 여기서 흔히 거론되는 말은 야다라는 "알다"(yada`)라는 뜻의 동사이다. 물론 이 말은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널리 이야기되고 있다. 개역 성서에서는 그러므로 동침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폰라드가 말한 것처럼 이 말은 단순히 섹스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감정과 접촉 전체를 포함한 체험의 단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할 때 이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체험하는 종교체험 다시 말하면 성령의 체험(시 51)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에덴 동산을 쫓겨난,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가 부모의 슬하를 떠나 부부가 되어 이제 부모의 직접적인 보호를 벗어났을 때 이들은 이제 참다운 부부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결합체로서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게 된다.


2절. 그녀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여기서 아벨은 히브리어로 hevel로서 "숨결. 허무" 등의 의미를 가진다. 잠 1:2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에서 "헛되다"와 같은 단어이다. 인생의 허무를 암시하는 단어이다. "양치는 자"란 양을 지키는 목자의 직업(ro`eh)을 말하고 농사하는 자(`eved)는 땅을 갈며 중노동 하는 것을 말한다.(참고. 노희원, "약속의 땅 에덴", [구약성서의 깊은 세계]). 창 2:15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데려오시고 이르시되, "야웨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고 ('avad) 지키게 (shamar) 하시고"라는 귀절에서 "다스리고" 라는 말이 이에 해당하는 말로 종(servant)의 의미와 예배(service)의 의미를 가진다. 이 두 가지 근본 의미는 섬기다(serve)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땅을 경작하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은 아담의 뒤를 이어서 농사꾼이 된 것이 나타난다. 직업만 이어지는 것이 아닌 그의 불순종의 죄 성도 같이 이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야웨께 드렸고 4. 아벨도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야웨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주목하지 아니 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계절의 끝에" 라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추수 감사절이 있는 9-10월의 시기는 과일과 곡식이 여무는 연말임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신년을 의미했다. 땅의 소산이란 땅의 열매(peri)를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축복하여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의 "생육"에 속하는 말로 축복의 근본에 속하는 말이다. 아벨은 기름진 첫 맏물의 양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열납하다"라는 말은 "받으셨다"라는 말이 아니라 "주목하다" (pay attention to)라는 뜻의 동사다. 여기서도 아벨과 그의 제물을 눈여겨보았다 라고 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왜 가인의 것은 거절하고 아벨의 것은 주목하셨는가 이다.


자기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라는 말은 새끼도 드리고 기름도 드리는 것일 수도 있고 가장 좋은 살지고 기름진 양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인은 단순히 땅의 소산(열매)으로 드렸다라는 말로 일단락 짓고 있는 반면에 아벨은 많은 양들 중에서 맏물 양을 구별해서 드리되 기름진 혹은 특별히 좋은 것(레 3:16; 신 32:38; 시 147:14 등)을 드렸다고 말함으로써 특별한 정성이 깃들여져있던 제물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G. Wenham, Genesis 1-15, p. 103) 이것을 JPS TORAH COMMENTARY p. 32 에서 Nahum M. Sarnah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신 6:5) 라는 유대교의 기본정신과 매우 일치하는 것으로 본다.


아담의 직업을 이어받은 가인처럼 목자가 직업이 아니어서 하나님이 제물을 열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성과 뜻이 제대로 담긴 제물을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을 통해서 볼 때 비교적 잘 어울리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C. Weatermann은 여기에 나오는 제물인 minchah가 감사의 선물의 의미를 담지 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순수한 자유의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나 이 견해는 왠지 하나님의 뜻을 더 세세하게 살피려는 의지가 약해 보이며 오직 정성과 뜻이 담긴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눈여겨보시고 그 반대는 경홀이 여기신다고 하겠다.

Sarna(p. 33)는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다"라는 말을 화를 냈다라는 뜻 보다는 "몹시 낙심이 되어" 라는 뜻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과 자신을 돌아보지 않자 그것은 가인에게 일종의 거절과 좌절로 다가온다. 그는 몹시 낙담하여 그의 얼굴을 떨군다. 여기서 안색이 변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얼굴을 떨군다로 되어 있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없고 떳떳치 못할 때 혹은 화가 치밀 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얼굴을 떨어뜨림은 어찜이뇨,


7절. 분명히 네 마음이 선하다면, 얼굴의 들림이 있었으리라. 선하지 아니하면 죄가 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이 너를 노리고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6절은 5절에서 가인에게 나타난 심적 현상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감지되었느냐에 대한 묘사이며 그 내용의 반복이다. 7절은 5절과 6절에 나타난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다. 7절은 다소간 어려운 문장이다. 여기서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은 tov라는 말의 동사형인 yatav라는 말로 복, 선, 기쁨, 유복함 등의 의미가 있다. "네가 참으로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있지 않겠는가" 라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이 형통치 못하다면 죄가 문 앞에 웅크리고(rovets) 그의 노림(teshuqato)이 너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통제해야 한다"(G.J. Wenham, 1987, pp. 104f.) 라는 말이다. 이 본문은 매우 난이한 문장으로 창 3:16절에서 하와에 대한 징벌의 문구와 같다. 웅크리다(ravats)라는 분사형(rovets)은 아카디아어로 마귀라는 말과 동족어로 나타난다. 노림이라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창 3:16절 하반절에 나타난다. 창 3:16b에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teshuqatek)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말을 7절 하반절에 적용하면 "죄가 너를 사모하나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cf. H. Gunkel, Genesis, 1997, p. 43-44)가 된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마소라 사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마리아 오경이나 칠십인역(LXX) 등 다른 사본들은 "우리가 들로 나가자"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으므로 필사 과정에서 현재 본문에 이 글자가 누락된 듯 하다. Nahum M. Sarna(p. 33)는 출 19:25에서와 같이 이미 알고 있을 목적어는 생략하는 것이 히브리어의 어법 중의 하나인 것으로 생각한다. 들판은 아무리 소리쳐도 도울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나타난다.(신 22:24, 27) 상황의 긴박성을 표현한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도 있다.


9절. 야웨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구절은 하나님이 타락 후 아담에게 묻는 질문과 같다. 단지 "네가 어디 있느냐" 대신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로 나온다. 아담은 "내가 옷을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창 3:10) 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 입니까"(9절) 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화 후에 창 3:14절 이후에와 마찬가지로 이제 4:10절에서 야웨의 징벌이 선포가 나타난다.


10절.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절. 네가 받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0-12은 하나님이 내리는 형벌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가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말한다. 창 3:13 에서는 하와에게 똑같은 말로 묻는다. 하와에게의 저주는 위에서 가인에게의 저주와 같다. 구약시대에는 피는 곧 생명으로 여겼다(신 12:23). 피를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는 것이므로 이를 금지시켰다.(창 9:4-6) 그러므로 피의 복수자(신 19:1-13)가 피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는 한 피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야웨가 피의 복수자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창 9:5; 왕상 21:19ff.).


여기서 나오는 가인에게의 저주는 이제 창 3:14절에 나오는 아담에게의 저주와 같다. 금지한 음식을 먹었으므로 땅이 저주를 받아 땅이 엉겅퀴를 내고 종신토록 수고를 해야 밭의 채소를 먹을 것이라고 명시되어있는 반면, 창 4:12절 가인에게 땅에서의 유랑자가 된다라는 저주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합하면 전자의 경우는 생명의 탄생과 연명을 위한 수고의 고통이 있어야 하는 반면 후자는 영원한 유랑자가 됨의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야웨를 떠나서는 참다운 마음의 안식이 없음을 말한다.


13절. 가인이 야웨께 고하되 내 벌이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나이다.


14절.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신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떠도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부분은 가인의 통회하는 심정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마치 시 51:14에서 다윗이 "하나님 내 구원의 하나님 죽음의 형벌에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라고 외치는 다윗의 심정과도 같다.


15절. 야웨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징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여기서 칠 배라는 의미의 문제이다. 이는 살인자를 포함해서 7명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나 삼하 21:7에 보면 사울이 이미 죽었으므로 죽인 자를 빼고 그의 자손 중에서 7명을 처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G.J. Wenham(p. 109)은 시 12:7(6); 79:12; 잠 6:31 등을 근거로 완전한 보응을 뜻하는 시적인 표현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보호의 상징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시는 것과 같이 죽음을 모면하는 상징적 징표를 가인에게 부여한다. 이 징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좋은 의미의 표로 출 13장에서 유월절 피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각 계약 때마다 무지개, 할례나 안식일, 또 예언이나 기적의 성취(출 3:12; 사 7:12)를 위한 것과 같은 징표를 나타내사 인간이 죽임을 당치 아니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백성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16절. "아담이 야웨의 앞을 떠나 에덴의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라" 라고 말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단락을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놋(nod)이라는 말은 "떠돌음" "방황함"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이라는 제목의 한국 가요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신앙 없는 인생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