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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 會 論(3)

V. 교회의 의식 (The Ordinances of the Church)


초대 기독교는 결코 의식 주의적 종교는 아니었다. 언제는 초대 기독교의 중심은 성령을 통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있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딱딱하고 요지부동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그 시대와 장소에 가장적합한 예배 의식을 채욕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매우 긴요한 의식이다.


이 의식들은 성격상으로 보아 매우 신성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다.

즉 물세례와 성찬식은 매우 긴요한 의식이다. 이 의식들은 성격상으로 보아 매우 신성하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聖禮라고 칭한다. 또한 이들을 가리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정해주신 하나의 예식이기 때문에 물세례는 기독교에 입교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영적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성찬의 의식으로 영적생명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나타내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례는 한번 받으면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영적 생활이 시작되는 때눈 한번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찬식에는 자주 참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영적 생명은 끊임 없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1. 세 례


(a) 방 법


"세례를 주다"(Baptize)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물속에 잠기는 것을 뜻한다. 세례는 원래 물 속에 잠기는 것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는 점에 대하여 헬라어 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약식 세례를 베푸는 교회에 속한 신학작들도 본래의 세례의 방법은 침례였다는 점을 시인하다. 더욱이 사도시대의 유대인들이 받은 세례가 침례였다는 점을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

저들은 이미 "개종자의 세례"(Proselyte's Baptism)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 개종자의 세례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받는 세례를 의미한다.


이 개종자의 세례를 받을 때에 사람들은 물이 목에까지 올라오는데 서서 율법서를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그 율법서의 낭독이 끝나면 그는 물속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아빙 종교의 모든 더러운 죄로부터 깨끗이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표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물을 찍어 베푸는 약식 세례를 어디서 유래하였는가? 기독교가 신약의단순성을 저버리고 이방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물세례에 대하여 비성서적인 중요성을 첨가하게 되었다.

물세례를 중생하게 절대적으로 긴요한 조건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병자와 죽어가고 있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이르렀다.


병자와 죽어가 있는 사람에게 침례는 도저히 베풀 수 없기 때문에 침례 대신에 약식 세례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침례보다는 약식 세례가 베풀기에 편리함으로 약식 세례가 일반화하게 되었다. 또한 침례를 베풀 만큼충분한 물이 없을 때에는 물을 머리 위에 부어서 세례를 베푸는 것도 허용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제 2세기 사람의 글인데 세례에 관한 것이므로 잘 참고하기 바란다.


" 세례에 관하여 논할 것 같으면 세례는 이렇게 베풀라. 세례를 베풀때에 흐르는 물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괴어 있는 물에서 세례를 베풀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찬물로 세례를 베풀수 없을 때에는 더운 물로 세례를 베풀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만일 찬물이나 더운 물 속에서 침례를 베풀수 없는 경우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이름도 세례를 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무를 세 번 붓도 세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세례의 본래의 방법은 침례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되었다. 이와 같은 침례를 통해서만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에 대한 세례의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롬6:1-4)


(b) 형 식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라는 말씀과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베드로의 명령과 어떻게 원만한 조화를 이룰수 있을가?(행2:38). 베드로가 명령한 말씀은 세례의 형식에 관계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이 말씀은 세례를 받는 자들은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시인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주후 190년경에 기록된 어떤 글에서 볼 것 같으면 기독 교인의 세례를 말할때는 주 예수의 세례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세례의 형식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는 성부,성자,성신 삼위의 이름이 다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세를하나님의 보내 준 인도자와 교사로 받아 드렸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전적으로 자신을 예수에게 의탁하고 그는 하늘이 보내주신 구세주로 받아 드리며 그의 인도하심에 따르겠다는 결의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례의 형식에대해서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것을 마태복음 28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행2:38,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으라"이다. 데이어의 레시콘(Thayer's Lexicon)에 의할 것 같으면 이는 유대인들이 그의 메시야의 권위에 대하여 신뢰심을 갖고 또한 소망을 두었던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삼위 일체의 형식은 하나의 체험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의하여 저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너희 무리와 함게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말할 수 있다.


(c) 세례를 받는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산 신앙을 갖게 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사도 시대의 교회내에서 세례식을 베풀 때는 다음과 같은 외적 표현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1) 신앙 고백 (행8:37) (2) 기도 (행22 :16) (3) 헌신의 서약 (벧전3:21)

유아들은 회개할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확실한 신앙 고백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물세례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결코 금하는 것은 아니다. (마19:13,14) 왜 그러냐 하면 공중 집회시에 하나님께 어린이들을 바치는 헌아식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d) 효 험


물세례 그 자체는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물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긴요한 요소하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세례가 완전한 순종을 나타내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는 있다.우리 나라의 대통령을 선출하여 그의 취임식을 갖임으로써 그가 대통령으로 온전히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개종자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택함에 있서 공적으로 이 사실을 나타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온전히 인정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e) 의 미


물세례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나타내 주고 있다.

(1) 구원, 물세례는 복음의근본적인 진리를 나타내 주는 성스러운 극이다 (만일 물세례를 가리켜 성스러운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개종자를 물 속에 잠그기 위하여 눕히는 행동은 성취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물 속에 개종자를 잠그는 행동자체는 그리스도의 장사지내신 바 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종자가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2) 체험, 개종자가 세례를 받았는 사실은 그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물속에 잠긴다는 것은 "이 사람을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죽는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종자가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의 새 생명으로 다시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게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3) 중생.중생의 체험을 가리켜 씻음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딛3:5) 왜 그러냐 하면 이 중생의 씻음을 통하여 옛 생활의 온갖 더러움과 조기 씻음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물로써 인간의 몸을 씻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성경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을 씻으신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이와 같은 중생의 씻음을 나타내 준다.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22:16)


(4) 간증."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물세례를 개종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뜻한다. 즉 군인들이 군복을 입으면 군인인 줄을 사람들이 보아 알듯이 개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옷입을 것 같으면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개종자가 세례의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라의 제복을 입게 되는 것이다.


2. 성찬식


성찬식은 기독교의 독특한 성례전으로서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기 전날 밤에 시작하여 하나의 제도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회생을 기념하는 것이 되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신자의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더욱 증가케하는 은혜의 수단도 되는 것이다. 이 의식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a) 기 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해마다 미국 국민들은 7월4일을 독립 기념일로 기억하고 기념한다. 곧 미국 국민들이 자유스러운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 교인들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일 때 마다. 저들은 저들을 죄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하게 기념하는 것이다.

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그의 모든 다른 사건 보다 죽음을더욱 중요시하여 기억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그의 단순한 생활과 교훈에 의하여 된것이 아니라 (물론 그의 생활과 교훈도 신령한 것이다) 그의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된 것이기 때문이다.


(b) 교 훈


주의 성만찬은 복음의 두 가지 기본적 진리를 나타내 주는 거룩한 실물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육신 (The Incarnation) 우리들이 떡을 떼고 있는 동안에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말슴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우리들은 또한 주님께서 선언하시는 말씀도 듣게 된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며을 주는 것이니라"

(요6:33).


(2) 속죄 (The atonment) 그리스도의 성윳신에 포함되어 있는 축복들은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곧 육체와 생명이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살과 피가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살과 피가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영적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는 많은 심령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생명의 떡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그의 몸을 깨뜨려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굶주린 심령들에게 양식과 소생케 하는 능력을 주며 죄를 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는데 포도주는그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c) 영 감


특별히 포도주는 우리들이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본질에 참여할 수 있다는것 즉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귐"을 갖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준다. 우리들이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취할 때에 우리들은 믿음에 의하여 참으로 그의 영을 받아 그의 인격을 우리들 속에서 나타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d) 확 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에서 곧 너희는 위하여 붓는 것이다." 고대의 가장 엄숙한 형태의 계약은 피의 언약이었던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서에는 희생의 피로써 서명 날인했던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피의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조건들을 제시해 놓은 것을 그의 백서들은 받아드렸던 것이다.

모세가 희생의 피를 양푼에 가득히 담아 가지고 그 반은 제단에 뿌렸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지킬 것이라는 뜻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에게 부었는데 이는 백성들로 이 언약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출24:3-8).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새로운 언약은 피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드렸다. (히9:1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로 대하신다는 하나님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일이다. (롬3:24,6) 다음으로 우리들은 새로운 언약의 피뿌림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벧전1:2).


(e) 책 임


그러면 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바울은 성만찬에 참여할 가치를 지니고 잇는 사람과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에 대하여 고전 11:20-34 속에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그러면 오직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무도 우리들 중에 그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인간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의 자비를 받아 드리겠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합당치 않다는 말은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라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주의 성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기에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주님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는 사람이야 말로 주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으리로움을 갖고 주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만이 자기의 무가치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은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합당치 않은 행동과 태도를 갖지 말도록 우리들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러면 주의 성만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주의 성만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엄숙하기 않고 경건치 않은 태도로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행동과 태도가 합당치 못한 행동과 태도라고 할 수 잇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행동과 태도가 극도로 합당치 못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포도주를 과하게 마시어 취하는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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